경주 동 남산의 탑곡마애조상군을 찾아서(2)
탑곡마애조상군은
통일신라시대때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3층석탑과
바위에 새겨진 9층탑과 7층탑이 있어서
탑곡(탑골)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높이가
약10m이고 둘레는 약 30m 되는 바위에는
불화를 감아 놓은 듯 화려한 조각을 하여
한폭의 만다라를 보는 듯 하며 그속에는
탑과 부처, 스님과 비천상, 금강역사와
사자상 등 바위의 구석 구석에 수 많은
불적들을 바위 사면에 새겨놓았으며
기법도 양각과 음각, 선각등
다양합니다 . 옥룡암
탑곡마애조사군이 있는 언덕위의 신인사지에서
북동쪽을 향하여 오후 3시30분 경에
찍은 사진입니다
북면(北面)을 향해 올려다보면, 영산정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산정토란 석가여래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나한들에게
설법을 하고 계신 곳이라고 합니다
북면의 중앙에는 천개(보개)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머리 위에서 햇빛을
가리워 주고 있습니다
천개는 인도와 같은 더운 나라에서는 햇빛을
가려 주기 위한 양산 같은 것이었으나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높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법당이나 옥좌 위에는 반드시
천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두 탑 사이의 바위 가운데 연화대좌 위에
앉은 석가여래상이 있으며
머리 위에는 천개가 햇빛을 가리고 있습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 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옷자락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대좌는 연화좌로 사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략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탑이 서 있는데
동편의 탑은 9층이고,
서편의 탑은 7층입니다.
탑의 모양과 구조는 거의 같으나 동탑은 2중기단 위에
세운 9층탑으로 1층은 비교적 높고 다음층
부터는 낮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동탑의 상륜부는 탑신이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는 데 비해
너무 선명한 것이 후대에 손을 본 것이 아닌 가,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 있고 탑 꼭대기에는
상륜부가 있습니다
그 위에 수연, 용차, 보주, 찰주 등 상륜부가 온전하게
조각 되어 있어서 신라 목탑의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이 9층 목탑이 황룡사 9층 목탑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탑의 각 지붕 가에는 풍탁이 달려있고, 각 층마다 두 개의
창문이 열려 있는데 열린 쪽을 더 깊게 새겨서 탑의
입체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9층탑 상륜부 꼭대기에는 2구의 천인이 날고 있는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과 영산정토를 찬미하는
뜻으로 새겨 놓은 것 같습니다.
서쪽에 있는 탑은 7층으로 모양은 동쪽에 있는
9층 탑과 같은 모습입니다
목탑 바로 밑에는 암 수 두 마리의 사자가
불국정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동쪽 사자상은 목에 털이 없어서 암사자로 보이나
입을 벌리고 있으며 꼬리가 세 갈래로 갈라져서
날리고 있는데
대릉원의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의 말 꼬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서쪽 사자상은 목에 털이 많으므로 숫사자로
입을 다물고 있으며 꼬리는 여러 갈래로
날리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입을 벌린 사자를 아(阿)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를 훔 사자라고 하며
짐승 중 가장 용맹스런 사자로 하여금 성스런 부처님
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히 잘 지키겠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 이라고 합니다.
이 부처바위 밑에는 오래전 부터 옹달샘 같은
우물터가 있었습니다
소풍을 왔다가 김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엎드려서 꿀꺾꿀꺾 마셔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동쪽 면은 이 바위에서 가장 화려한
극락정토가 장엄된 면으로
벽면 중앙에는 극락정토의 주불이신
아미타여래 가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 너비는 약 13m 정도 되며 바위가
세부분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첫째 면에는 두 불상과 그 둘레에 하늘을
나는듯 한 천인상이 여러구 보입니다.
두 부처님은 선명하지만 비천상은 마모가 심해
있는 듯 없는 듯 합니다.
자세히 보면 일곱 비천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두 불상 중 본존불은 아미타여래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원형 두광을 하고 계십니다.
본존불 오른쪽에는 협시보살 같은 흔적이 보여
삼존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천상에 가까워 이불 병좌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본존 여래상의 머리위로 새 한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가릉빈가 라고 하는 극락조라고 합니다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본존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본존불 왼쪽에 있는 협시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 동면은 극락정토로 하늘에서 천인이 내려오고,
낙원에서 살면서 고운 소리로 노래만 한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 까지 날며 극락세계를
축복하고 찬양하는 것 같습니다.
이 비천상은 대부분 측면관(옆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처바위에는 비천상이 11구가 있으며
그 중에서 정면관(바로보는 모습)을 하고 있는
비천상은 이 비천 한 구 뿐입니다
동면의 북쪽 아래에는 4각의 방석위에 앉은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면서 열심히 염불을
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동편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결가부좌로 앉아 선정에 든
스님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하단의 사바 세계에서 열심히 불경을
공부하던 그 스님이 득도를 하셔서 참선에
들어 계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왼편 세 번째 바위엔 동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있는 스님상이 새겨져있습니다.
절 입구에 있는 기둥바위 인데 키보다 더 큰
삼지창을 들고 절의 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는데
맞은편에도 한 개의 돌기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기둥바위는 탑 사이에 남향의 절터로 오르내리는
길이 나 있으니 화엄불국으로 들어가는 이 절의
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역사상의 발 모습이 특징적입니다
이렇게 좁은 돌문이 가람의 정문이라는 것은
바로 이 부처바위가 부처님이 계신
법당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남면의 동쪽 바위 면에는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세 불상을 새겼습니다
가운데 본존불은 큰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고,
양쪽 협시보살은 모두 합장을 하고, 본존불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있습다.
동쪽에는 보리수가 있고 그늘 아래는 삼존불이 자리에
같이 앉아서 정답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고 합니다
입술을 자세히 보면 립스틱을 칠한 듯 붉은 색이
보이는데 이것은 불상에 채색을 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삼존불 가운데 본존상은 큰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물결치는 듯
주름이 잡혀있습니다
이러한 옷자락을 상현좌라고 한답니다
삼존불을 모실 때는 본존불이 앉으시면
협시보살은 서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삼존이 모두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연꽃위에 앉아 합장을 하고
머리를 본존불을 향하여 돌리고 있어서 두광도
타원형으로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변화를 주면서도 얇은 조각에
입체적인 깊이를 느끼게 합니다
왼쪽 협시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합장을 하고 본존불 가까이에 앉아 있습니다
얕은 감실 안에 아라한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광도 없고 연화대좌도 없어서 선정에 든 스님
같으나 머리 위에 작은 육계가 있는 듯 하여
스님상 인지, 불상 인지 단정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부처바위의 얕은 조각에 힘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서
여기에 풍성한 입체상을 세움으로써 바위
전체에 활기를 보태어 생동감 있게 한
신기가 놀랍다고 합니다
몸체는 대석의 홈에 끼워 넣었고 두광과 얼굴 일부가
손상 되었으나 볼록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로 보아 여성처럼 보입니다.
왼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살짝
데고 서 있습니다
손모양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입상에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데
왼손을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출산을
도와주는 안산불이라고도 합니다
석조여래 입상은 몸통과 다리부분이 다른
석질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대석에는 발만 새겨져 있고 발목 윗부분만
하나의 돌로 된 불상입니다
이 돌은 최근에 많은 할머님들이 찾아오셔서
지극정성으로이 돌을 돌리면서 소원을
기원하시는 돌입니다
삼존불 앞 중간에 있는 큰 바위 면에는
명상에 잠겨 있는 인자해 보이는
스님 한 분이 계십니다
보리수나무 밑에서 남쪽을 향하여 손을
가슴에 올리고 탑을 향하여 참선을
하는스님의 모습입니다
삼존불 앞에 있는 바위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탑 앞에는 석등 자리인 듯 한 둥근 홈이
바위에 있습니다.
단층 기단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옥개 받침이
삼단으로 되어있고 솜씨가 세련되지 못하여
신라 말기의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높이가 4.5 m의 작은 탑이지만 높은 언덕에
있어서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지면을 높여서
안치 하였으며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다시 모아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 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구멍에는 금속으로 무슨 장식을
했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서면은 면적이 좁아서 부처님 한 분과 비천 두 구가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양 옆에는 협시보살 대신에 보리수 그늘 아래
부처님이 큰 연꽃의 대좌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입니다
머리위에는 육계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눈과 코, 입술이 이 바위에 새겨진 어느 불상
보다도 근엄한 표정입니다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서 확인할 수 없으며
머리 뒤에는 보주형으로 된 두광이 보입니다
이 면은 동방유리광의 세계이고 부처님은 약사여래로
중생들의 병마에 의한 고통을 들어주는 보살로써
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머리위에는 비천이 피리를 불면서
옆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있으며
11구의 비천상 가운데서 유일하게 전신을
보여주고 있는 비천상입니다
구멍이 뚫여 있는 하단을 보면 비천상이
한 구 자리하고 있습니다
만다라란?
밀교에서 발달한 상징의 형식을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
신성한 단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으로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 이라는 의미 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입니다.
윤원구족으로 낱낱의 살이 속 바퀴 축에 모여
둥근 수레바퀴를 이루듯이, 모든 법을
원만히 다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라시대의 사방 불에는 동쪽에는 약사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로 되어 있으나
남북에는 일정한 약속이 없기 때문에
남북의 부처는 무슨 부처인지
알 수 가 없다고 합니다.
북면을 정면으로 보았을 때 이 바위 면은 왼쪽이 되고
왼쪽은 좌청룡이니 청룡의 방향은 동쪽이기 때문에
약사여래불 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이 곳까지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는 8월 17일(월)과 23일(일) 이곳에 오시면
제가 탑곡(골)마애조상군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옥룡암과 이육사
이 곳 탑곡마애조상군이 있는 사찰의 옥룡암은
1924년 박 일정 스님이 짓기 시작해서
이 심신녀 보살과 이 분이 키운 비구니
만석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절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뜰 옆에 만석인 경봉스님의
공덕비가 서 있습니다.
1942년 8월 이 육사님이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때 쓴 “경주 옥룡암에서 신석초 에게” 란
시조가 있습니다.
뵈올까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루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울까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촉 태우고 앉았으니
이별에 병든 몸이 나을 길 없으매라
저 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까하노라
경주남산의 남산성과 남산신성
1. 남산성 ; 해목령을 중심하여 3.7Km에 이르는 성을 쌓으니,
이 성이 신라 도성의 중심이 되는 남산성이다.
남산성의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는 포곡형(包谷形)의 산성입니다.
남산성은 신라 국방의 중심지 되는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남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고 합니다
2. 남산신성 ; 남산성을 남산신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왜 새신 자(新)자가 붙었을까요 ?
남산성은 기존에 남산에 있던 성곽을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591년)이
전국 각지에서 인력을 징발해 남산성을 새로 만들었다하여
신성(新城)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런 명칭은 성곽을 쌓으면서 성벽 일정 구간마다
신성비(新城碑)를 새웠는데 이 비문에서도 나타난 명칭입니다.
경주남산 신성비는 모두 200여개로 추정 되는데
현재까지 모두 10개가 발견 되었다고 하며.
이러한 제도를 현대의 모든 축조물에 적용한다면
부실공사를 막을 수 있는 좋은 제도라고 생각 됩니다.
경주남산신성비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남산신성비의 내용
비석의 크기 : 높이 88cm, 너비 42cm, 두께 11cm 글자 : 한 줄에 20자씩 아홉 줄
신해년 (진평왕 13년 A.D 591) 2월 26일 우리들은 남산에 신성을 쌓는 일을
맡았는데 정해진 법대로 어김없이 쌓을 것을 맹세한다. 만일 완성된 날부터
3년 이내에 무너졌을 때에는 우리들은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서약하는 글을 새기고 감독 지휘자들과 동원된 마을의 대표자들과 목수,
석공들의 계급과 직책이 새겨져 있는데 이 비석에 적힌 15명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11보 3척 8촌 길이의 성벽을 쌓았는데
15.52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경주문화재답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장사지 삼륜대좌불을 찾아서 (0) | 2010.09.23 |
---|---|
상선암 마애여래좌상을 찾아서 (0) | 2010.09.23 |
분황사를 처음 찾아서 (0) | 2010.09.23 |
경주 오야리 삼층석탑을 찾아서 (0) | 2010.09.22 |
재매정을 찾아서 (0) | 2010.09.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