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명활성을 찾아서
이 명활산성성은
보문단지가 있는 보문호
남쪽의 명활산에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석성과 남쪽
봉우리를 감싼 토성이 있으나 석성만
사적4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문
단지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입니다 . 명활산성
명활산성
산성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육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 촌장인 배씨시조 지타공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라고 하며
동해쪽에서 오는 왜병에 대비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북쪽 봉우리의 석성
명활성은 왕경의 동쪽을 방비하는 최일선의 성곽으로
북쪽의 봉우리는 표고가 252m에 약4.5km의
포곡식 석성으로 사적 제4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성입니다
무너진 석성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성으로 사용
자비왕 18년(475)에는 왕경의 도시 계획으로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다가
소지왕 1년(479)에 월성으로
다시 옮겼다고 합니다
명활성 작성비
이 작성비는 1988년 8월 홍수로 명활성의 북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는데 그 곳에서
이 명활성 작성비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66.8cm 나비가 31cm
두깨가 16.5cm 라고 합니다
명활성 작성 비문의 내용
이 비문에는 작성간지가 있는 서두와 축성공사
총책임자의 인명, 실무자의 인명과 담당거리,
위치,참가자 수, 공사기간, 글쓴이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석재는 화강암
석재는 50cm 45cm 정도 크기의 화강암으로
내외면을 쌓고 속 채움은 잡석으로 채웠으며
성벽의 내부에는 약 4m 정도의 통로를
만들었다는 흔적이 보입니다
비담의 난과 김유신장군
]
비담의 난으로 비담은 선덕여왕때의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최고위직의 상대등 이었으나
여자가 왕위에 있다는데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명활성에
웅거했던 것으로 김유신 장군의 정부군과 격전에서
큰 별이 월성에 떨어져 군사들이 사기를 잃고 있을 때
김유신은 성부산에서 연을 만들어 불을 실어
날려보내면서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고 하여비담의 난을
평정하게 되는 설화입니다
일제시대 때 세운 고적비
일제시대때 세워진 이 비석은 높이가 87cm 너비가 20cm
옆면이 23cm 의 크기에 조선총독부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세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고적
제16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산성 밑에 있는 정토암이라는 암자의
담벽에도 조선총독부 라는 글씨가
세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쏙 들어오는 보문단지
보문단지의 위락시설들이 보문호수를 축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서 있습니다
지구의 같은 비행 기구
아름다운 보문호의 각종 시설들입니다 이 보다는
호수의 물 위로 겨울철새들의 한가로운
모습이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좀 .............
북군 마을의 한옥 촌
대궐같은 기와집들로 구성된 마을인데 중앙 쯤 전망대
같은 좋은 집에서 고급양주를 마셔가면서
월드컵 축구경기를 응원한 추억들이
눈에 선 합니다만........?
아무튼 오늘도 어려운 길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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