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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제천 배론 성지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3. 3. 23.

 

제천 배론 성지를 찾아서

 

 

배론 성지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 2리 646번지 일대에 있는

성지로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 이루어진 곳으로 1861년에 선종

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

님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장주기 성인 등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으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 이라 하였으며

노아의 방주처럼 거친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

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항해하는 배를 지어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 평화. 희망

의 뜻을 담았고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

셨던 불굴의 선교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이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

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바다의

별 이란 대성당 이라고 합니다

 

배론 성지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 2리 646번지 일대에 있는 성지로

1801년 황사영 순교자가 머물며 백서를 썼고 1855년에는 사제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세워져 1866까지 신학교육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배론 성지는 1861년에 선종하신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이 있으며 장주기 성인 등 여러 순교자들이 살던 거룩한 땅입니다

 

배론 성지는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 이라 하였으며

노아의 방주처럼 거친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항해하는 배를 형상화 하였다고 합니다  

 

배론 성지는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 평화. 희망의 뜻을 담았고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 의지를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배론 성지는 이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바다의 별

이란 대성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배론 성지는 바다의 별이라는 대성당과 소성당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입니다

 

배론 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했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 하였다고 하는데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삼천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배론 성당의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배론 성당은 대지 8,749m2, 연면적 2059.18m2로 대성당 수용인원은

2,000여명이고, 소성당의 수용인원 300여명이고, 전시관까지

포함하면 총 수용인원은 약 3,000여명이라고 합니다.

 

배론 본당은 성지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누각 성당입니다. 

 

황사영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되어 1790년에 이승훈

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한 후 알렉시오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습니다.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최인길의 집에서 주 신부를

만나고부터는 벼슬길을 버리고 전교 사업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황사영은 1798년 서울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활동적인 교회 지도자로 부상하셨습니다.

 

한번 전파된 천주교 신앙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빠르고 더 넓게 온 나라 구석구석으로 전파되어 갔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박해를 피해 배론으로 피신하여

황심, 김한빈,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었고 교회의 재건

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소일하셨습니다.

 

황사영은 그 해 8월 23일 황심 으로 부터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듣고는 박해의 경과와 교회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려고 백서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황사영 백서 토굴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전 황사영순교자의 백서가 쓰여진

장소로서 겉보기에도 보잘것없고 작은 공간이 당시의 박해상황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우리선조 신앙인의 굳건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황심이 9월15일 체포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으며 백서는

압수되었으며 황사영과 관련자들이 순교한 후 백서 사건은 종료

되지만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배론을 답사한 원주본당 정규량 신부는‘황사영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에

배론 점촌 지굴 속에서 백서를 쓰다가 체포되었다’고 하여

그의 은신처가 땅 굴 이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조선 총독부 시대에 일본인 야마구치는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선교사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 집의 북쪽 부엌 뒤에

있으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야마구치가 답사했을 때 1935년에 이사 온 집주인인 최재현이 신학교 교사

였음을 확증하였고 이 집 뒤뜰에 옹기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습니다.

 

배론 공소 안창현 회장의 손자인 안태화는 어린시절 10대 안팎일 때 신학교

건물인 최재현 집 위에 위치한 굴에 드나들며 놀았고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 굴은 토굴이었지 옹기 굴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야마구치 등의 기록과 증언 현지의 지세를 종합하여 볼 때 즉 1801년

김귀동의 옹기점 뒤 산비탈을 이용하여 1m 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을 것이라고 합니다.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하여 옹기를 겹겹이 쌓아 옹기저장고로

가장하고 넓이는 어른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넓이라고 합니다

 

 

토굴 입구는 1m 반 정도 돌로 쌓아 올렸고 굴의 천정은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보이며 입구와 달리 안쪽은 토벽으로 된 토굴 이었고 천정 위는 흙을

덮어 비탈진 언덕 모습으로 만들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황사영이 1801년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하며 토굴은 1988년 서울대

이원순 교수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은 1982년 6월 29일 배론의 성요셉 성당과 함께

축복식을 하였으며 높이 20m로 입체4면 종탑 누각형으로 전면에는

황사영순교현양탑 이라고 판각되어 있습니다.

 

황사영 순교 현양탑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고 누각

내부에는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종 3개가 달려있습니다

 

순교자 황사영 동상은 2005년 9월 23일 순교자현양대회 때에 축복

하였으며 화강암 기초위에 가로 73cm 세로 8cm 높이 235cm로

관복을 입고 하늘을 우러르는 형태의 동상입니다.

 

순교자 황사영 동상은 일본에 있는 황사영의 후손인 황병위씨가 기증 건립

하였으며 북한에서 제작하여 일본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순교한 사람은 정광수(바르나바), 홍익만(안토니오),

김계완, 손경윤(제르바시오), 김의호, 송재기, 최설애, 김일호, 장덕유,

변득중, 이경도(가롤로), 황일광(알렉시오), 한덕윤, 홍인,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등이라고 합니다.

 

황사영을 숨겨주었던 집 주인 김귀동은 혹독한 형벌에도 배교하지 않았고,

사형 선고를 받아 홍주로 이송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과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만들었습니다.

 

신학당이 있었다는 자리 입니다

 

배론 신학교는 1855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장주기성인이 거주하시던 집이었으나 후에 신학교 건물로

기증하여 여기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 신부는 즉시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와 김대건이 발탁되었습니다.

 

제 1회 조선 신학생의 선서문 1836년 12월 2일

조선 신학생이 수업할 신학교 교장 ○○○ 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노라.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목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나에게와 또한 나의 뒤를 이어 조선교회를 다스릴 수석 성직자들에게

장상의 허가 없이는 그들이 지정하지 아니한 다른 지방이나

다른 회로 가지 않을 것을 맹세하느냐?

- 맹세합니다.

 

외방전교회 신부 조선선교사, 조선교회의 수석으로 있는 나는 이 소년들

최 프란치스코(최 야고보와 황 안나의 아들), 최 토마스, 김 안드레아

이들이 예수 고상 앞에서 복음 성경 위에 손을 얹고

1836년 12월 2일 서약하였음을 받았음.

 

세 소년은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고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1844년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페레올 주교

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 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최양업은1849년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습니다.

 

조선 교구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하게 되었는데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가장 큰 목표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여 이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습니다.

 

조선인 사제를 양성하여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고 합니다

 

메스트로 신부는 배론 신학교 설립 외에도 처음 고아원 사업을 하는 등

착하고 순한 성격으로 최양업 신부와 많은 조선의 신자들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교를

성요셉 신학교라고 하였습니다.

 

정확히 고증하기 어려우나 1930년 정규하 신부를 비롯한 배론 교우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1948년 9월 27일 주재용 신부가 작성한 도면 등을 참고로

현 위치에 건축된 성 요셉 배론 신학교는 현재 충북 지방문화제

제 11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장주기(1803-1866) 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셉, 일명 낙소.

경기도 수원 느지지(화성군 양감면 육당리)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장주기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1821-1861년) 신부는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서, 세례명은 토마스. 양업은 아명이고 관명은 정구,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과 이성례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

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으로 김대건 신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최경환은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로 피신하여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가던 중 16살에 이 곳 수리산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조각공원으로 최양업 신부님의 일대기가

조각되어 있는 조각공원 전경입니다.

조각공원 중앙 제대입니다.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 교회사로 볼 때도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배론에

천주교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791년에(정조15)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로 한국 천주교 역사와 맥을 함께 합니다.

 

 

배론성지가 있는 골짜기가 배(舟) 밑창을 닮았다 하여 배론(舟論)으로

불렸는데 한자어로 쓰면 舟論(주론)이지만 론은 토론한다는 말이

아니라 곳을 나타내는 우리말입니다. 

 

배론 성지는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숨어든 교우들의 은신처로서의 처음

교우촌이 시작된 곳으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은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배론 성지는 우리나라 어느 성지보다도 다양한 신앙 유산을 지닌 곳으로

조선의 최초 서구식 교육이 이루어진 첫 신학교가 세워진 곳입니다. 

 

배론은 일찍이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며 옹기 토굴에서 황사영이 비단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앙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를 쓴 곳입니다.

 

배론 성지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이 이곳의 옹기 굴에 숨어서

조선 교회의 박해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작성하여

베이징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순교를 당한 사건입니다

 

배론 공소회장 장주기 요셉의 집에 1855년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교장 푸르티에 신부, 교사 프티 니콜라 신부가 조선인

신학생을 가르쳤고 1861년 최양업 신부가 문경으로 가는 길에서 병사

하자 푸르티에 신부 일행이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당은 한문이나 한글뿐 아니라 수사학·

철학·신학 등도 가르쳤으며 한국 천주교 교육의 요람이었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 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폐쇄되었습니다.

 

이 묘소는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신부님의 묘소로 배론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위치하며 이곳에 올라서면 배론성지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지며 최양업 신부님의 부르심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배론이 중요한 성지로서의 의미는 바로 최양업 신부님의 무덤으로 최양업

신부님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과 함께 공부를 하러

떠났지만 그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12년 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습니다.

 

최 신부님은 지나친 열성으로 사목활동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병사한 후 이곳 배론의 신학교 뒷산에 묻힌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른다면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배론 성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성지나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의미의 성지와 사적들이 병행하며

복음사의 애환을 간직해 온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입니다

 

미사시간 안내표지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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