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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얼굴없는 영지석불좌상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1. 6. 21.

얼굴없는 영지석불좌상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와『경주읍지(慶州邑誌)』에 전하는 글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불국사를 중건할 당시, 석가탑 축조를 위하여 초청되어온 백제 장인 아사달(阿斯達)의 아내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찾아왔다. 절의 스님이 말하기를 탑의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그 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고 하였다. 아사녀는 날마다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몇 달이 지나도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빠져 죽었다

탑 조성공사를 마친 아사달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영지로 달려왔으나 아사녀를 찾을 수 없었다. 슬퍼하던 아사달은 영지 주변의 바위에 아사녀의 모습을 불상으로 조각한 뒤 아사녀를 따라 영지못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석가탑을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하고 이 못을 영지(影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지석불좌상은 영지 바로 못미쳐 길 가에서 20여 m 정도 떨어진 평지에 있다. 낮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노천불로서 이를 봉안했던 사찰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창건과 폐사 시기에 대해서도 남아있는 근거가 없다

 

다만 1917년에 발간된 『경주유적및 유물조사서』에 '영지불좌상의 동편에는 소나무 숲이 있다. 부근에 와편(瓦片)이 산재해 있고, 초석 등이 보인다.'라는 조사기록이 남아 있어서 이 석불을 모신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고  또 『동경통지(東京通志)』의 고려시대 관련 언급 중「불국사 서남쪽 십리 되는 곳에 영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석조불상이 있다(佛國寺…西南十里有池名影池池邊有石刻佛像)」를 통하여, 고려시대에 이미 폐사되어 석조좌불상만이 남았을 것이라고 추정이 된다.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영지석불좌상은 불상,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각 부분의 손상이 심하다. 특히 얼굴과 오른쪽 광배 부분의 파손이 심하며, 오른쪽 무릎과 손, 상대석의 좌우 뒷부분, 중대석 상부 등에도 고의적인 파손형태가 보인다.

또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불의 표면이 오랜 풍화로 인하여 마모가 되면서 처음 만들어진 당시의 자세한 모습을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불좌상의 조형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영지석불좌상은 불신과 같은 돌에 새겨진 배모양의 거신광배(舟形擧身光)를 뒤에 두고  3단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어, 기본 형식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좌상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이 불상의 특이한 점은 입상(立像)이 아닌 좌상(坐像)인데도 불신을 광배와 한돌로 조각하여 놓았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광배와 한돌로 조각된 석조불상은 입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경향으로서, 좌불상에서는 극히 드물다,

보물 제319호인 통일신라시대의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고려시대의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광배와 불신이 한 돌로 되어 있는 경우인데  이  두 기의 좌불상도 영지석불상과 같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광배 윗 부분의 삼존화불 흔적

 

광배에는 두 줄의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광배의 바깥쪽에는 화염문(火焰文), 안쪽에는 초엽문(草葉文)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융기선 위에는 단독 화불(化佛)이 있고 두광 정상에 삼존화불이 있으나 심한 마모로 인하여 뚜렷하지가 않다.

 

 

마모가 된 얼굴부분

(일설에는 미완성된 불상이라고 하나 근거는 없다)

 

결가부좌에 선정인과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파손으로 인하여 얼굴의 표현은 전혀 알 수가 없으나 대체로 원만하고 풍만한 얼굴 윤곽이었을 것이다.

삼도를 나타낸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법의는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다.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 건장한 불신에 밀착되게 입혀진 얇은 법의, 동체의 양감과 굴곡을 강조하는 표현 등은 일반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석굴암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의 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의 조성시기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조성시기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 8세기 후반 혹은 9세기 초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석불상의 연화문대좌

 

대좌는 상·중·하대석이 모두 다른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원형으로 만들어진 상대석에는 앙련의 연화문(蓮花文)  8개씩 2단으로 모두 16엽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는 2단의 층단받침이 표현되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면마다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
하대석 윗부분에는 4단 팔각층단받침이 있고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24개의 복련 연화문이 덮고 있으며 팔각기대(基臺)가 한돌로 만들어져 있다.

 

 

영지 석불좌상의 뒷면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깃든 영지

 

 

경주시에서는 영지 일대 16만5000여㎡에 신라시대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영지설화공원(影池說話公園)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에 있다.
이 사업에는 약 100억원이 소요되며  2016년 완공을 목표로 두고 있다고 2010년에 발표한 적이 있으나 아직 시각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는 상태이다

 

※ 2010년 동국대 강석근(52ㆍ교양교육원) 교수는 불국사 석가탑을 조성하기 위해 백제에서 건너온 아사달과 아사녀는 백제사람이 아닌 당나라사람이며 또한 부부간이 아닌 남매라는 주장을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 있다.


찾아 가는 길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를 타고 울산쪽으로 가다가

불국사역을 지나서 약 2km쯤 가면 육교 못미쳐 신호등이 있고 오른쪽에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약 1km, 영지 못미쳐 왼쪽에 있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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