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를 찾아서
고우니방을 찾아
주시는 귀빈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8월 5일 부터 8월
19일까지 고우니 방을 비워서 죄송
합니다 그간 미동부와 서부, 캐나다
서부쪽을 다녀왔습니다 엠파이어스테
이트빌딩, 그랜드캐년, 라스베가스, 나이
야가라 폭포, 월풀, 자유의 여신상,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 하버드 대학 등등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을 다녀왔습니다
처서를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느낌이 피부에 와 닿는 것 같
습니다 고우니가 불국사 근무를 명
받았기에 불국사를 정리하면서
자료들을 한 번 올려 봅니다
→ 불국사 전경
불국사는 조계종 11교구 본사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게문화유산이며
불국사 경내가 사적 제 502호로 국보 7점, 보물 2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보 7점, (다보탑 20, 석가탑 21, 연화교와 칠보교 22, 청운교와 백운교 23.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26, 금동아미타여래 좌상 27,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26 ) = 보물 2점, (사리탑 61, 석수조 1523)
불국은 부처님의 나라 라는 뜻으로 불국사는 사바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한 공간에 표현하면서 석축과 계단, 연못 등을 통해서
두 세계를 구분하고 있는 곳입니다
신라 경덕왕(751)때 재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님을 위하여 석굴암을 짓고,
현세의 부모님을 위하여 불국사를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습니다.
현재 불국사는 조선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70년도에 복원 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 불국사 입구 일주문
매표소 겸 진입로인 큰 일주문을 지나면 새로 놓인 다리가 있고
연지가 있습니다.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 관문입니다
일주문에는 토함산 불국사라는 산사의 이름이 걸려지는데
불국사라는 절 이름만 적힌 현판이 있습니다
→ 반야교
일주문을 지나면 연못을 건너는 무지개 다리가 반야교인데
반야교를 건너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 천왕문
반야교를 지나면 천왕문이 있는데 천왕문에 들어서면
좌우로 사천왕이 서 있습니다.
천왕문은 사천왕이 지키는 문으로 사천왕은 사찰을 수호하며
속세의 모든 잡념을 씻어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 불국사 사천왕상
동, 서, 남, 북으로 사찰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는
사천왕은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 입니다.
→ 사천왕상의 생령좌(마구니)
사천왕이 사람 형상을 밟고 있거나 사타구니에 끼고 있는 것을
생령좌(마구니)라고 합니다
생령좌를 만들 때 추풍령 이남에서는 훈도시를 찬 왜구를,
추풍령 이북에서는 갑옷을 입은 오랑캐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천왕문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므로 이 문 밖은 천하가 되고
문 안쪽은 천상이 됩니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우측으로 불국사 성보박물관이 있고
정면에 청운교 백운교가 보입니다.
→ 해탈교
천왕문을 지나면 무지개 모양을 한 반야교와 달리 수평으로 된
해탈교를 지나게 되는데 해탈이란 번뇌와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열반과 같은 의미 입니다
→ 불이문
불이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선악, 유무 등 상대적인 개념이
모두 둘이 아니라는 의미로 불이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정토인 법당에 들어선 것이라고 합니다
불국사에는 자하문과 안양문이 불이문에 해당되는데 현재
불국사에는 동쪽 출입문이 일주문이고 서쪽 출입문이
불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 불국사 구품연지
구품연지는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연지라고도 하는데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 있는 연못으로
가로가 49m 세로가 39m 의 크기로 범영루와 자하문 중간에
보이는 수구와 해탈교가 있는 수로를 통해
물이 공급 되었습니다
→ 불국사 가람배치
앞에 보이는 계단이 국보 23호인 청운교와 백운교 이고 그 위에 있는 전각이
자하문이며 자하문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앞뜰에는 국보 제 20호인 다보탑과 국보 제 21호인
석가탑이 있으며 대웅전 뒤편에는 무설전과 관음전,
비로전이 있습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계단이 국보 제 22호인 연화교와 칠보교 이고
그 위에 있는 전각이 안양문이며 안양문 안에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극락전이 있으며 그 뒤편에는
나한전이 있습니다
자하문 우측으로 보이는 전각이 좌경루 이고 자하문 좌측으로
보이는 전각이 범영루입니다
→ 불국사 석조 (보물 제 1523호)
불국사 석조는 청운교 백운교 동편에 있으며
불국사 옥로수(감로수)라 하여
물을 먹는 곳입니다.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만든 것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인데,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어져 있고, 입구는 안쪽으로 살짝
말려있으며 바깥 면은 도드라진 띠와 안상을
얕게 새겨 장식하였고,
안쪽 면은 바닥과 옆 벽면에
연꽃무늬를 두었습니다.
특히 바닥에 새긴 연꽃무늬는 길쭉한 타원형을 둘러싸듯 좌ㆍ우ㆍ
상ㆍ하에 하나씩 두었으며수조에 물이 가득
찼을 떼는 마치 연꽃이 떠 있는 듯한
효과를 보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돌을 이용한 것이면서도
투박하지 않고 경쾌하며 석조 가운데 걸작품에 속합니다.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으나 부처에게 공양하는 연꽃을
심어두었다고도 하며 지금은 식수를 제공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 청운교 백운교
청운교ㆍ백운교(국보 제23호)는 계단의 수가 아래 17단,
위쪽이 16단으로 합하면 33계단으로
33이라는 숫자는 이 다리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자하문은
수미산의 꼭대기인 도리천이 되는데 도리천은
부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구조는 홍예형 구조로
안정적이며 청운교 백운교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으나 문화재청에서는 윗쪽이 청운교.
아랫쪽이 백운교 라고 합니다.
일반 중생들이 다니는 연화교. 칠보교와는 달리 청운교와
백운교는 스님들만 출입을 하는데 계단이 더 높고
경사가 더 가파릅니다
우리가 사생결단을 낼 때 이판사판 이라는 말은
수행하는 스님을 이판, 사무 보는 스님을 사판
이라고 하는데
스님들께 이판입니까? 사판입니까? 라고 물어도
아무대답도 하지 않아서 이판 아니면 사판이겠지?
한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 불국사 자하문
청운교ㆍ백운교를 지나면 불국세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자하문이
나오는데 자하란 붉을 자, 안개하 자를 써서 붉은 안개란
뜻으로 부처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색 광명이
안개처럼 서려 있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대진리의 세계가 열린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 불국사 대웅전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대웅전 또는 격을 높여 대웅보전
이라고 하며 대웅전은 1765년 중창된 조선시대 건물로
토축으로 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다포식 팔작 지붕에 한 조각의 철물도
사용하지 않은 목조건물로
4면에 돌계단이 있고 좌우는 회랑으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웅전 현판 옆의 용의 입모양과 화려한 단청과 물고기,
봉황 머리 조각 등은 볼만합니다.
→ 불국사 대웅전 내부
내부에는 중앙에 목조 석가 삼존불을 봉안하고
그 좌우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고
다시 그 좌우로 가섭과 아난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으며
정면 앞에는 석등과 배례석(봉로대)가 있습니다.
→ 다보탑 (국보 제21호)
다보탑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특수한 모양의 탑으로
다보여래상주증명탑이라고 하며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한 것
이라고 합니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습니다.
→ 다보탑의 돌사자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2마리는 일본으로 밀반출되고
1마리는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다고 하며
현재는 기단에 한 마리만 남아 있습니다.
심원 동전에 다보탑 앞에 불상이 있다고
교체를 요구한 적이 있는데 불상이 아니라
바로 이 돌사자라고 합니다
→ 다보탑의 구조와 명칭
다보탑은 그 모양이 특이하지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조성되어 있으며
2층이다 3층이다라고 하는 논란이 있으나
탑신부와 옥개부로 보아 2층으로 생각되며,
8각형의 지붕돌 위에는
원형의 노반과 복발을 올려놓았는데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하며
중생들이 사성제와 8정도의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탑이라고 합니다
다보탑은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 형태의 석재들을
목조 건축물 처럼 짜 맞춘 것으로
연꽃과 죽절의 기둥, 난초꽃 모양의 받침, 국화 모양의
받침돌 개석에 붙은 매화 모양의 장식이 있어서
매, 난, 국, 죽의 사군자라고도 합니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특히 탑속에 들어 있는 사리 장엄구의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석가탑 (국보 제 21호)
대웅전 서쪽에 있는 탑으로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석가탑'이라고 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를 세운 3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입니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ㆍ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주춧돌 모양의 돌(팔방금강좌)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 따서 복원하였으며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팔방금강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곳은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1966년 9월 도굴꾼들이 탑을 훼손한 일이 있어서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하는데,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연못(영지)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 무설전
극락전 옆의 48계단을 지나면 대웅전으로 이어지고
무설전이 보이는데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로
1973년 새로이 세워진 중창된 건물로
지금은 불교미술관련 제품들을 진열하고 있습니다.
무설전의 무설이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공부하는 것으로 능가경에
손가락으로 허공에 떠 있는 달을 가켰으면
달을 쳐다 보아야지 왜 손가락만 보느냐?
라는 구절이 있는데
눈에서 달까지가 공부의 전 과정 이라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까지가 유설이고
손가락 끝에서부터 달 까지가 무설인 것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공부가 바로 무설이기 때문에
무설전이라고 합니다
무설전은 신라 문무왕 10년에 왕명으로 무설전을 짓고
화엄경을 강의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 창건 보다 약 100년 앞서 지어진 건물이지만
1593년 임진왜란 때 불 탄 뒤 1708년에 중건하여
보존하여 오다가 허물어진 것을 1972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입니다
무설전 안에는 지장왕보살 김교각 스님의
조상이 모셔져 있는데
김교각스님은 신라 33대 성덕왕의 아들로 출가하여
당나라 구화산에서 수도교화하셨으며
지장신앙이 깊었다고 합니다
→ 관음전
비로전에서 사리탑 반대 방향으로 가면
높은 계단위로 관음전이 있는데
1973년 새로 복원되어 지어진 건물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천수천안)이 있습니다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사찰의 중심건물일 경우에는 원통전이라 하고
부속 건물일 때는 관음전이라고 합니다
볼관(觀) 소리음(音) 자를 써서 관음이라고 한 것은
어머니가 아기의 울음소리만 듣고서도
배가 고픈지 오줌을 쌌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이 고뇌를 당할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만 듣고서도
그 음성을 관하고 고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하여
관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성별은
수시로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서 나타나며
금생과 다음 생이 다를 수 있는데
보살이 화관을 쓰고 천의와 목걸이 귀걸이 팔찌 영락 등의
장신구를 하고 연꽃, 보주. 정병을 들고 있는 것은
자비로움을 표현 하는데는 여성이 적격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낙가교 = 관음전을 오르는 계단
관음전은
그 사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통례이며
불국사 관음전도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불국사를 보면
전체 전경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은 높은 계단들로
여기가 불국사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관음전을 높은 곳에 짓는 것은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교화학기 위하여
머물렀던 곳이 보타 낙가산으로 바위 절벽으로 된 산
이었던 것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합니다
→ 비로전
무설전 서쪽으로 있는 비로전은 1660년 중수되었으나
1973년 중창 불사 때 새로 지어진 건물로
내부에는 국보 제26호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으며,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은 매우 얇게 표현되어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주름의 표현은 사실적이며
손 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어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과는
반대로 표현되었습니다.
불국사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 이라고 합니다.
→ 비로전 옆에 있는 부도 (보물 제61호)
불국사에는 국보 7점과 보물 2점이 있는데
바로 이 부도가 보물 제 61호입니다
부도는 고승의 사리를 모시는 탑의 일종으로
돌 기단 위에 종 모양의 둥근 돌을 올리고
연꽃을 조각한 그 위에 지붕돌을 얹는 것이
일반적인 부도의 모습입니다
이 부도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에 탑신과 옥개석을 얹은 형태로
6각형의 지복석 위에 연꽃 받침을 두고 그 위에
구름문양을 양각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고동형의 탑신을 얹은 다음 제일 윗 부분에
우아한 탑 덮개를 덮었습니다
고동모양의 배부른 탑신에는 사방 감실을 파고
여래좌상 2구와 보살 입상 2구를 새겨 놓았으며
그 위에는 구름문양이 드리워져 있는 화려하고
섬세한 특이한 형태의 부도입니다
현재 작은 보호각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외형이 석등과 흡사한 사리탑으로,
불국사 사적기에 나오는 광학부도로 추정된다고 하며
1906년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다가
1933년 도쿄의 나가오라는 제약회사의 사장의 집
정원에서 발견되어 1935년 반환된 28년만에
제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 연화교와 칠보교
연화교ㆍ칠보교는 국보 제22호로 일반 중생들이 다니던 곳으로
아래쪽에 있는 계단에 연꽃이 새겨져 있어서 연화교라고 하며
연화교와 칠보교는 전체가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있습니다.
위쪽 계단은 칠보교인데
'칠보'는 경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7가지 보석인 금 은 청옥
수정 진주 마노 호박 이라고 합니다.
→ 연화교 연꽃문양
연꽃 문양이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약간의 흔적만 보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위쪽 홍예 부분에 선명한 연꽃
문양을 볼 수 있으며
10개의 계단으로 된 연화교는 십년왕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십년왕생이란 부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라도 임종 전에
신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10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의 명호로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 불국사 안양문
연화교ㆍ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이 있는데
극락전으로 가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야
극락전으로 갈 수 있으며
극락세계는 칠보로 장식되어 있고 연꽃으로 된
꽃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안양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쉬게 한다"는 뜻으로
극락세계의 다른 이름 입니다
현재의 안양문은 1960년에 중건한 건물로
고려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 극락전
정면에 보이는 극락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뒤
1750년에 중창하였으며 1925년 일제강점기 때
다시 중수를 한 전각입니다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아미타 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무량광불
또는 무량수불이라고 하며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앞에는 탑이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미타불은 열반에 드신 적이 없기 때문에
불사리를 모신 탑을 조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 극락전 앞 석등(왼쪽)과 극락전 기단 중수명문(오른쪽)
극락전 기단에는 중수한 명문들이 적혀 있습니다
→ 극락전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 27호 )
극락전에는
국보 제27호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어깨 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습니다.
→ 극락전 옆 48원교
극락전 옆으로 48계단이 있는데
이는 16계단을 3열로 배치하여 합한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48서원을 상징하는 것이며,
계단이 3열인 것은 수행하는 사람을 상배, 중배, 하배로 나누고
다시 극락세계에 왕생함에는 상, 중, 하품으로 나누어
상품상생에서, 하품하생까지 9품으로 나누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16계단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하여 닦아야 할
16관(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 불국사 석축
불국사는 산지가람으로 높은 축대를 기준으로
축대의 위는 불국의 세계이고
아래는 사바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축대의 동쪽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서쪽에는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습니다
→ 그랭이 기법 석축
불국사의 축대는 그랭이 기법이란 전통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자연 그대로의 돌을 이용하여 쌓은 것입니다.
자연석 위에 인공으로 깎은 장대석에 그랭이질을 하였기 때문에
천여 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 불국사 수구 (불국사 누혈에서 물)
누혈(석루조)은 비오는 날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 불국사 석축
→ 불국사 범영루
청운교ㆍ백운교 옆으로(왼쪽)는 범영루가 있는데
원래 이 건물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수미 범종각”이라 불렀다고 하며
수미산 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백팔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내부에 법고가 있습니다.
→ 불국사 좌경루
축대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말에 없어진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으며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목어와 운판이 걸려 있습니다
→ 불국사 법고
거북이 등 위에 올려져 있는 큰 북이 법고 인데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을 불전 사물이라 하여
예불을 올릴 때 사용합니다
법고는 지상의 온갖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립니다
법고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한 쪽에는 암소가죽을 대고
다른 쪽에는 황소가죽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법고는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시작하기 전인 오전 3시 30분과
오후 6시 30분경에 불전사물과 함께 울리는 것이 라고 합니다
법고를 치는 방법은 마음심(心)자를
그리듯이 친다고 합니다
→ 불국사 목어
목어는 물에 사는 짐승을 제도한다고 하며
물고기는 항상 눈을 뜨고 있으므로
수행자도 졸지 않고 불도를 닦으라는 뜻에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 불국사 운판
운판은 공중을 날아 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한다고 하며
청동이나 철로 써 구름무늬 모양을 만들고
판 위에 보살상이나 옴마니반메홈의
진언을 새긴다고 합니다
→ 불국사 범종
범종은 우주의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며
범종은 새벽에는 28번(천상세계),
저녁에는 36번(우주관)을 칩니다
당목은 포뢰용의 형태인 고래모양으로
만들어서 당좌를 칩니다
→ 불국사 당간지주
당간지주 2쌍은 통일신라 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 현재 옮겨져 있는데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 근처에 세워서
여기가 부처님의 세계라는 것을 알리는 것으로
당이라고 하는 깃발을 당간에 매달아
세우게 하는 고정장치입니다
법당 앞에 있는 작은 것은 법회시
괘불을 걸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 나한전
지금의 나한전은 1973년도에 새로 세워진 전각으로
현제 나한전에 모셔져 있는 16나한은
조선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나한상 뒤의 후불 탱화는 보살들이 궁중 예복을
하고 있는 특별한 그림입니다
나한전은 십육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
오백나한을 모신 전각을 오백나한전
이라고 합니다
→ 코끼리 대좌
현재 종각 바로 위 전통 차 집 앞 뜰에는 불국사 복원 공사를 하면서
출토된 각종 석조물 들 중에 불상의 대좌들을
몇 개 방치하고 있는데
그 중 주목되는 것은 코끼리좌와 사자좌입니다.
→ 불국사 종무소 거북이 문
→ 화장실 문 거북이
또
한 종무소내에 문짝과 화장실의 여 닫는 문짝에
거북이들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신라시대 변기 부춛돌
신라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변기(부춛돌) 로 남자용 여자용 수세식 등으로 설명되어지기도 하나 변기돌이 남아 있단 그 자체로 주목됩니다.
참고 자료
극락전 벽화
불국사는 어느 사찰과는 달리 전각 안팎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유일하게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도'와 '반야용선도', '선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곳 극락전에는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지 않고 주불(主佛)인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습니다.
그 대신 중앙에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아미타삼존도
후불탱화가 있습니다.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慈悲門)과 지혜문(智慧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관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각각 표시함으로써 이 양대 보살이 불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보살이라 하겠습니다.
관음이 자비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면 대세지는 지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고
합니다.
즉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비치어 지옥 ․ 아귀 ․ 축생의
삼악도를 여의게 하고 무한한 힘을 주므로 대세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관음보살이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머리의 보관에 보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을 하기도 합니다.
연꽃의 의미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극락전의 오른쪽에 보이는 벽화가 반야용선도입니다
반야용선은 중생들을 태워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게 합니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것은 지혜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자, 극락으로 가는 길입니다.
반야용선의 선장은 인로왕보살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준다고
합니다.
벽화에 보이는 나루는 아미타삼존불께서 마중 나오시는 모습과 하늘에서 비천(飛天)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극락전 천정 아래에는 선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비천상이 신라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 선녀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훼손이 심한 편입니다
석조 비로자나삼존불 대좌
종각 남동쪽 통로 옆에 있는 이 석조 비로자나삼존불 대좌는 1969년 발굴조사 때 출토된
석조물 중의 일부입니다.
이들 대좌는 삼존불의 대좌로 추정되지만 본존이나 협시보살상은 남아 있지 않고
대좌 자체도 깨어진 채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나 네모진 받침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자와 코끼리 대좌는 문수와 보현보살의
대좌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 ․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비로자나삼존불은 통일신라시대의 것
으로는 현재 성주 법수사와 이곳 불국사의 것이 유일한 사례입니다.
본존의 대좌는 9세기 중엽에 유행하던 팔각대좌인데 그 구조나 삼단으로 각진 괴임의 형식, 연꽃잎 속에 다시 복잡한 꽃무늬를 새긴 조각 솜씨 등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과
법수사 삼존불 대좌와 흡사하다고 합니다.
사자좌와 코끼리좌는 머리가 떨어지고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위가 좁은 직사각형의 하대와
그 위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와 코끼리의 모습 역시 법수사의 그것과 같다고 합니다.
『불국사고금역대기』에는 751년 중창 당시 문수전에 모신 비로자나불 석상과 좌우의 문수 ․ 보현보살 좌대가 산불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들 대좌는 그 양식으로 미루어 불국사가
중창되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석조 변기(便器)?
법화전 터 뒤쪽으로 가면 석조가 있는데 그 주위로 여러 가지 형태의 석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상한 형태의 석조물을 볼 수 있는데 돌로 된 변기입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고 그 수가 많습니다.
흔히 이것을 매화석이라고도 합니다.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의 대변을 그냥 변이라고 하기 어려워 '매화'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천 년 전 스님들이 사용하던 석조 변기라고 해서 그 격을 높여 매화석으로 부르는 것
같습니다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 관음보살벽화 2점 발견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 스님을 통해
추진 중인 『사찰건축물 벽화 조사사업』중 경주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구의 관음보살벽화를 발견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 벽화는 후대에 덧칠해진 호분(胡粉)에 가려져 그 존재가 드러
나지 않았는데, 올해 초 성보문화재 연구원의 예비조사 중 존재가
확인된 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조사·분석(적외선 촬영)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도상(圖像)을 판독하게 됐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상을 보면 우측은 백의관음보살도33관음중 하나로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보살피며, 흰 옷을 입고 있음)이며, 좌측은
어람관음보살도(33관음중 하나로 나찰, 독룡, 아귀의 해를 제거해
주는 관음으로 모습은 물고기를 타고 있거나 물고기가 가득찬 어람
즉 소쿠리를 들고 있음)입니다.
크기는 2구 각각 세로 4.3m, 가로 1.8m 내외이며. 이들은 18세기의
도상적 특징들을 갖춘 18세기 불화로 편년되는데, 이중 물고기 담은
바구니를 들고있는 형상의 어람관음보살도는 현존하는 벽화 중 양산
신흥사의 예를 제외하면, 18세기의 벽화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이들 벽화에 대한 정밀조사는 최근 완료되었으며, 조사결과는 올해
말 발간할 『한국의 사찰벽화(경북 남부편)』보고서에 수록할 예정
이라고 합니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그간 일반적으로 진행했던 벽화에 대한 사진
촬영·상태기록 외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분석조사(적외선
촬영, 안료분석)가 더해져서 보다 진일보한 조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계기로 사찰벽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조사를 지속
적으로 실시해 향후 사찰벽화의 보존을 위한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
토록 할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한국의 사찰벽화 조사사업은 탈색·박락 등으로 훼손이 가중되고 있는 전국의 사찰벽화 보존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 및 중요 벽화의 지정을
목적으로 200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2010년에는 경북 남부
지역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불국사 창건설화(創建說話)
『삼국유사』효선편(孝善編)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는 『鄕傳』에
실린 것을 인용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 설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해
성과 같았다. 그래서 대성이라고 이름했다.
집이 궁색하여 생활할 수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衣食)을 해결했다.
어느 날 덕망 있는 스님 점개가 육륜회를 흥륜사에서 열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했는데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가 다음과 같이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
하시니 천신이 항상 수호하리라. 하나의 보시로 만 배를 얻으시고 안락하며 장수하소서."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 밖에서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 합니다.
우리가 전생에 선한 일을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훗날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그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뒤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리기를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를 네 집에 맡기겠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사람을 모량리에 보내 알아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외침이 있던 그 날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금으로 만든 패)가 있어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그의 예전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봉양하였다.
김대성은 다 자라서는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를 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는가?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서하고 꿈을 깨니 땀으로 잠자리가 젖었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
이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원력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여
신림(神琳) ․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거주케 하였다.
불상을 성대히 설치해 기르신 은혜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듣기 힘든 것이었다. 이에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阿斯女)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으로 백제의 장인 '아사달(阿斯達)'이 만들었고
이 탑에는 그의 아내 '아사녀'와의 슬픈 사랑이 얽힌 설화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석가탑에 얽힌 설화는 빙허(憑虛) 현진건이 지난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석가탑 건립과
관련한 전설을 다룬 역사 소설인 '무영탑'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전설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믿는 사람이 많다.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진실'로 둔갑한 것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는 마치 1천여년도 넘는
신라시대 때 있었던 이야기로 인식돼 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무영탑에는 김대성이 얻은 천하의 명공 아사달은 부여 사람이다.
그는 백제에서 가장 이름 높던 석수 명장인 부석의 수제자로 등장한다.
원로 부석의 딸 아사녀와 신혼가정을 이루고 나서 사랑의 단꿈에 깨어나기도 전에 백제의
명예를 짊어지고 아사달은 서라벌에 파견된다.
그 후 아사녀는 남편 아사달을 못잊어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왔으나 결국 남편을 만나보지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원래 무영탑 이야기는 일본 동경도서관에 있는 불국사 고금창기의 설화가 바탕이다.
불국사 고금창기의 원 이름은 '경상도강좌대도호부 경주동령토함산 대화엄종불국사고금
역대제현계창기이며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 화상이 지었다.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 건축물과 유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적어서 현재로서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적기로 평가되고 있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이라고 한다.
불국사 건축 때 장공(匠工) 가운데 당(唐)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한 누이동생이 있어 아사녀(阿斯女)라고 했다.
아사녀가 그 장공을 찾아왔으나 감독관이 이르기를 대공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안 되니
이튿날 아침 서방 십리쯤 된 곳에 가면 천연의 못이 있을 터이니 그 못에 가면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이 말을 따라 거기에 가보니 탑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래서 이 탑의 이름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영탑 소설에서 고금창기 아사녀 이름에서 '아사달'이라는 가상
인물을 등장시켜 아사녀의 남편으로 만든 것이다.
원문에 나온 '매(妹)'자는 '누이'를 뜻하는 것이지 소설에서처럼 '아내'가 아닌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표훈(表訓)과 신림(神琳)
김대성의 신앙심이 아무리 독실하고 정치 ․ 경제적 배경이 막강하며 예술가로서의 안목과
재능을 갖추었다 해도,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국사를 조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대 명장들의 수많은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대역사였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신라인의 솜씨와 기술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이 무렵 만불산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장인이 있었고, 30만 근의 분황사 약사여래상을
만든 강고내말과 봉덕사종을 주조한 박한미 등이 있었다.
봉덕사종의 4배가 되는 황룡사종을 만든 것도 지리산 화엄사가 창건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만불산은 높이 한 발 정도의 인공산에 1만 불상과 1천 여 승상을 조각한 것으로,
이를 선물로 받았던 당나라 대종이 "신라의 기교는 천조(天造)"라고까지 감탄할 정도의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처럼 8세기 중반 신라의 기술과 예술적 수준은 높았고, 이것이 곧 불국사가 창건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성은 신도였다.
이것은 불국사 창건을 위해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한계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자문에 응하면서 그를 도운 고승이 있었을 것이다.
불국사와 석불사에 처음으로 청해서 모신 승려는 김대성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향전』에는 신림과 표훈 두 성사를 청했다고 했고,
『사중기』에는 유가대덕(瑜伽大德)이었다고 해서 약간의 혼란이 있다.
그러나 표훈과 신림이 불국사 창건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들의 부도가 이 절에 있었고 또 다른 기록에도 이들이 불국사와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훈은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흥륜사 금당에 모셨던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는 경덕왕 때 대표적인 화엄학자였고, 국왕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영향력 있는
고승이었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을 강의했고, 찾아온 김대성에게도 화엄의 3종 삼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던 사실이 있었다.
이처럼 표훈은 대성과 특별한 인연으로 해서 불국사에 주석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신림 또한 불국사에서 베풀어진 법회를 주관하고 화엄 교학을 강의한 일이 있음이 확인
되고 있다.
신림은 의상의 손제자로 부석(浮石)의 적손이었다.
그는 8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에 활동했다.
그가 부석사에서 법회를 이끌고 있을 때 천 여 명의 대중이 운집했고, 그의 문하에
법융(法融) ․ 순응(順應) 등 많은 학승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신림도 당시의 대표적이 화엄학자였다.
신림이 표훈과 마찬가지로 김대성의 불국사 창건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가대덕도 불국사와 어떤 형태의 인연이 있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이 자료는 없다.
유가대덕을 유가종의 대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출처 : 김상현 ․ 김동현 ․ 곽동석, 불국사, 대원각, 2008)
1.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
불국사의 사명(寺名)인 불국은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이다.
우리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차안이라 하고 부처님의 나라 불국토는 피안이다.
불국사는 불국토 즉 피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신라인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찰이다.
이와 같은 신라인들의 염원은 불국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불국사는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한 공간에 표현하면서 석축과 계단, 연못 등을 통해 두 세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꿈에 그리던 불국 즉 피안의 세계 그 자체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이 땅에 구현해 놓은 사찰이다.
2. 불국사 창건의 역사
불국사 창건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기록으로는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세 가지 서책이 있다.
『불국사사적』의 저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스님으로 전하고 있다.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불국사에 대해서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19대 눌지왕 때 아도(我道)의 청으로 제일가람(第一
伽藍) 흥륜사와 함께 제일선사(第一禪寺)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아직 공인되기 이전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말았다.
법흥왕 대에 와서 왕의 뜻으로 불국사 중창의 역사(役事)를 시작하게
되었고 진흥왕이 이것을 계승하여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 후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대대적인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중창은 진흥왕 때 하였으며 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비구니가 되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여 불국사에 봉안하였음을 기록하고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중건되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와 김대성에 관한 설화에서 "절에 전하는 기록에 말하기를 경덕왕대의 재상인 대성이 불국사를 처음 세웠다"고 하여 위의 두 기록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대성은 신라 경덕왕 때 실재하던 인물로 벼슬이 중시(中侍)에 이르렀던 김대정(金大正)으로 추정된다.
3. 임진왜란 때의 참화와 복구
불국사 지장전 벽 사이에 활과 칼을 감추었다.
왜구 수십 명이 불국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둘러보다가 무기가
감추어진 것을 보고는 불을 질렀다.
장수사에서 난을 피하고 있던 담화(曇華)대사가 문도를 이끌고 달려
왔지만, 화마는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을 제외한 2천여 칸의 건물을
삼켜버렸다.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와 석탑 등은 다행히 불길의 화를 면했다.
김대성이 24년의 정성을 쏟아서 건설하고, 85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처이자 자랑이었던 불국이 야만 왜구의 손에 의해 한순간 불
타고만 것이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604년(선조37년)부터 복구가 시작되어 150년 동안 복구와 중수의 불사가 계속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4. 불국의 세계에 이르기 까지
사찰은 평지나 석굴의 형태로 있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산 속에 있다.
그러나 그냥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건너는 다리 하나, 우리가 지나가는 문 하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흔히 절에 들어서기 위해서 극락교를 지나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게 되는데 이를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삼문(三門)이라고도 한다.
이 곳 불국사는 일주문을 지나 반야교를 건넌 후 천왕문을 통과하고
자하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또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경덕왕(景德王)과 표훈대덕(表勳大德)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表勳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上帝)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마는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마는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는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문란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 (하늘과 사람 사이를)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아야 한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는 8세 때에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미처 막아낼 수 없었다.
표훈이 말이 그대로 맞았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婦女)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이 된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한다.
(출처 : 『삼국유사』기이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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