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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스크랩] 10월 정기 답사 하편 (백제의 관)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0. 10. 22.

時間으로의 여행, 신라문화동인회 10월 정기답사기 (하편)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신라문화동인회와 경주학연구소의 약 80 여명의 회원은 태운 큰 수레 두대는 혼잡한 도심을 앞거너니, 뒤서거니 하며 빠져 나와 궁내동 톨게이트를 지나 충남 공주의 국립공주박물관을 향해 달렸다. 4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공주는 박물관근처가 매우 혼잡했다. 대백제전행사의 마지막 날이기에 경주의 벚꽃 피는 4월의 주말과도 비교될 정도로 차량과 인파로 북세통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백제 웅진기의 수도였던 공주. 일단 백제라는 용어 자체가 먼 남의 나라이야기처럼 들였던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우리의 선조는 드넓은 만주벌판을 누비던 기마민족인 옛 구고려인의 후예라는 것을 배웠고, 한반도 끝트머리에 있는 작은 나라,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나라로, 그 주역인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의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그러나 백제에 대해서 배운 것은 기껏해야 시조인 온조와 비류 이야기와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말아 먹은 의자왕과 낙화암의 삼천궁녀이야기정도였다. 백제는 우리 한민족 형성의 한 축을 이루었지만,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약간은 먼 나라의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서울에서 태어나 약29년을 서울에서 살았었지만, 서울이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이고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인 것으로만 알았었다. 고구려 태조 동명성왕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한강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21대 개로왕이 고구려에 의해 죽고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거의 500년가까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것은 인식하지도 못하였었다. 


 고구려의 한성 점령과 개로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지만, 그 뒤를 이은 문주왕이 이곳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의 기틀을 다시 바로 잡고 538년 사비로 천도를 하기 까지 약6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옹진).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신라문화동인회 10월 정기답사의 마지막 코스로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리는 백제의 관 특별전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럼 이제,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무조건 앞사람만 따라 갔다. 거리에는 사람과 차들로 북적였고, 주변은 행사장 스피커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앞사람 뒷통수만 따라 약 5분 정도 걸으니 국립공주박물관이 반갑게 동인들을 맞이한다.



답사를 왔응께, 출석부 한장 박아야죠. 단체사진 찍는다는 답사분과위원장, 꼬끼오 선생님 말씀에 박물관 앞 계단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계림선생님을 "꼬끼오 선생님" 이라 부르면, 사모님인 부회장님은 "꼬꼬댁" 이라 호칭해야하는 건지... ㅎㅎ

"자자~~ 여러분, 즐겁게 관람하시고 5시30분까지 다시 모이세요, 저녁 먹으러 갑니다"

계림선생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동인들은 삼삼오오 혹은 홀홀단신으로 적진으로 행했다.



나는 처음 백제의 관 특별전을 보러 간다고 하기에, 관?...관=널? 시신을 넣는 관 특별전인줄 알았었다...@@







그림인지 벽회인지 모르겠으나, 관을 쓴 사람들의 모습.





첫번째 사진은 수렵도에서 따온 사진 같은데, 확인해 보니 아니고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2~3번째 사진은 안악 3호분 벽화네요.





그림으로 본 각 나라의 관









전시장 초입에 신라, 가야, 왜의 금관과 금동관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비록 복제품이나 복원품이진만... 왜의 금동관들이 보기보다 삐까뻔쩍합니다.



보물 338호 금령총 금관( 6세기초. 복제품)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에서는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으로, 높이 27㎝, 지름 15㎝의 금관이다.

 중앙 정면과 그 좌우에 山자형 장식을 4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했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사슴뿔 장식 가지 2개를 붙였다. 관 테와 5개의 가지에는 모두 같은 장식이 되어 있다. 표면 아래·위에 두 줄로 된 점무늬를 찍고, 그 사이에 나뭇잎 모양의 원판을 달아 장식했다. 관 테의 좌우에는 귀고리 형태의 드리개(장식)를 달았다.

이 금관은 다른 금관에서 볼 수 있는 옥 장식이 없고, 금으로만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금관에 出 자 가지가 4개면 천마총이나 금령총 금관입니다. 좀 간단해 보이고 장식옥이 없으면 금령총 금관이라 보시면 됩니다. 가지에 봉황 혹은 계림선생님(닭 모양)이 앉아 계시면 서봉총이라 보시면 되고요. 황남대총과 금관총은 어떻게 구별하는지 저도 모름..
아참 유치원생이 만든 것처럼 보이면 교동 금관입니다.. ㅋㅋㅋ



금동관 (고령 지산동 32호분, 가야 5세기초. 복제품)



금동관 (일본 나라현 후지노키고분, 고분시대 6세기 후반. 복원품)



비록 복원품이지만 삐까뻔쩍해서 사진 한장 더...



금동관 (일본 이바라키현 산마이즈카 고분. 고분시대 5세기말~6세기초. 복원품)





금동관 (일본 시가현 가모이나리야마고분. 고분시대 6세기초. 복원품)



사람세김기와조각 (부여 능산리사지, 6세기)



얼굴무늬토기조각 (부여 관북리 7세기)







금동관 조각(위 사진)과 금동관식 조각(아래 사진) (익산 입점리 1호분, 5세기 중엽)



금동관 조각 (천안 용원리 9호분. 5세기 중엽)



금동관 조각 (함평 신덕 고분 1호묘. 5세기말 ~6세기초)













은제장식 (부여 능산리 능안골 44호분, 6세기 중엽)



은제관식 (논산 육곡리 7호분, 6세기말~7세기초)



국보 154호 무령왕 금제관식(왕)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올만에 진품하나가 나왔네요. 그것도 국보로 ^&^




국보 155호 무령왕비 금제관식 (복제품)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誌石)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은제관식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묘, 6세기 중엽)



은제관식 (부여 염창리 3-72호분, 7세기)



은제관식 (나주 덕흥리 고분군, 6세기말 ~ 7세기초)



철제관테와 은제관식 (부여 능산리 능안골 36호분 동편, 6세기 중엽).



금동관 장식 (부여 능산리 중상총 고분, 7세기)



철제관테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묘 동편, 6세기 중엽)



철제관테와 은제관식 (부여 능산리 능안골 36호분 서편, 6세기 후반)



철제관테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묘 서편, 6세기 중엽)



금제관식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묘 동편, 6세기 중엽)



철제관테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묘 동편, 6세기 중엽)



철제관테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묘 서편, 6세기 중엽)



철제관테 (서산 추동리 C-9호분)



운모 관장식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 577년 전후)



철제관테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 577년 전후)



철제관테 (청양 장승리 A-11호분, 6세기)





금동관 (서산 부장리 5호분, 5세기 중엽)



금동관 (공주 수촌리 2-1호분, 5세기 초)

이 금동관의 복원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금동관 (공주 수촌리 2-1호분, 5세기 초)의 복원품



금동관 (공주 수촌리 2-4호분, 5세기 중엽)

이 금동관의 복원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금동관 (공주 수촌리 2-4호분, 5세기 중엽) 복원품



금동관 (익산 입점리 1호분, 5세기 중엽. 복제품)



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 (복제품)



국보 295호 나주 신촌리 금동관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발견된 높이 25.5㎝의 금동관이다. 나주 신촌리 9호 무덤은 1917∼1918년에 일본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이 금동관은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3개를 머리에 두른 띠 부분인 대륜에 꽂아 세웠으며, 내관은 반원형의 동판 2장을 맞붙여 만들었다. 기본 형태는 신라 금관과 같으나 머리 띠에 꽂은 장식이 신라 관의 ‘山’자 모양이 아닌 복잡한 풀꽃 모양을 하고 있어, 양식상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내관인 모자는 전북 익산 입점리(사적 제347호)와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화 교류관계를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동관의 주인은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세력의 최고 지도자였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다만 이 금동관이 현지의 토착 세력에 의해 제작된 것인지 백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인지에 대하여는 미상이다.





금동관 (합천 옥전 23호분, 가야 5세기 전반)



금동관 (합천 옥전 23호분, 가야 5세기 전반. 복원품)



금동관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 고분시대 5세기 후반. 복원품)



금동관 조각 (일본 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 고분시대 5세기 후반)



금동관 (일본 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 고분시대 5세기 후반. 복원품)





금동산형관식 (전 집안, 고구려)



금동관 (대구 비산동 37호분 2석실, 신라 5세기)





금동관 (강릉 초당동 B-16호분, 신라 6세기. 복원품)



금동관 (전 상주, 신라 6세기)



금동관 (일본 군마현 금관총, 고분시대 6세기 후반)



금동관 (성주 가암동, 가야 5세기)



금동관 (고령 지산동 30-2호분, 가야 5세기 전반)



금동관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 고분시대 5세기 후반. 복원품)















황남대총 특별전이나 고려불화대전에 비해선 매우 초라한 규모였으나, 생소한 백제의 관에 대해 알수 있는 의미있는 특별전이었습니다.



관람을 마친 후 시간이 약 10분 남아 박물관 직원에게 "한가지만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당신이라면 무엇을 보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무령왕릉에서 나온 진묘수를 추천하더군요.

진묘수는 무령왕릉을 지키던 상상의 동물로 왕릉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생긴게 꼭 돼지처럼 생겼는데... ㅎㅎ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을 돌아보며 느낀 점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과 비교해서 정말 "큰집"이라 부를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또 한가지는 국립공주박물관이 매우 작아 보이더군요. 백제 웅진기의 수도였다지만, 60여년 정도의 짧은 세월이었고, 백제 멸망 후 선조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방치되어왔고, 또 도굴을 당해서 인지, 유물도 그리 변변치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경주박물관은 크기와 유물에 있어서 비교가 안될정도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람을 마친 후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모두 배가 고파서인지, 열심히 드시더군요 ㅎㅎ. 답사시 회원들 배곪지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는 답사위원장님이신 계림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항상 웃는 얼굴의 최원호 선생님.
동안이시라 만만해 보여 꼬봉으로 삼으려고 나이 물어보았다가 회원이 있더군요... ㅋㅋ
최원호 선생님 이제 포즈 좀 바꾸세요. 항상 어린아이처럼 포즈가...ㅎㅎ

 식사를 마치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경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로 향하는데, 멀리 공산성의 불빛과 그 앞 다리에 밝혀진 조명, 그리고 캄캄한 금강위에 화사한 등을 밝히고 떠가는 배들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내려오는 길 차안에서 회장님의 말씀과 상품걸린 재미있는 퀴즈가 이어져 내려오는 길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선조가 힘이 약할 때 약탈당하고,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우리가 팔아 먹은 귀중한 고려불화들" (김윤근 동인회 회장님 어록에서)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집에 와보니 퀴즈 맞혀 회장님에게 하사 받은 경주박물관학교 30주년 기념지 새얼과 신라문물연구원선생님이 주신 자료집 등.. 전리품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



이상으로 10월 신라문화동인회 정기 답사기를 모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없고 부족한 글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1월 정기답사 때 뵈요 ~~~

출처 : 신라문화동인회
글쓴이 : 박정호(찢어진 워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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