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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청송 심씨 종가인 송소고택을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09. 4. 28.

청송 심씨 종가인 송소고택을 찾아서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

 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의 부를 지낸 건물입니다경북 북부 민가 양식으로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조선시대 민가 최대 규모인 아흔아홉 칸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로 지정된 고택입니다 

 

송소고택

 

입구에서 본 송소고택입니다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영조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는

곳으로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는 전체적으로 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습니다.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별당은 2채인데, 하나는 대문채이고 또 하나는 별당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입니다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 정승이 열 셋, 왕비가 넷,

부마를 넷 씩이나 낳은 사색의 주류인 서인집이라고 합니다.

 

고려 때 위위사승을 지낸 심홍부를 시조로 하여 증손인 덕부.원부에서크게 둘로 갈라졌는데,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덕부의 후손이 그 하나요 또 새 왕조의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들어가 유훈을 지키면서 선훈불두하여 고향에 산 원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청송 지방에 흩어져 사는 심씨 들이 대개 심원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현재 청송에는 심원부의 장증손 심상악씨외 10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덕천 심부자로도 그 명성이 높다고 합니다.  

  

경북 북부 민가양식으로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토석담장 내에 안채 및 중문채, 대문채, 별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건물이 모두 장대하고 격식(格式)을 갖추고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에 홍살(紅箭)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居處)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朝鮮時代) 영조(英祖)때 만석(萬石)의 부(富)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상(祖上)의 본거지인 덕천동으로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부를 지낸 건물입니다.


 

양반고택에서  숙박을 하면서 추억을 만들어 가는 따뜻한 보그자리

온돌 부엌입니다 직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보아도 된다고 합니다

 

 

천연염색체험도 할 수 있고 주변에는 야생화들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 있는 화장실인데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걱정않으셔도 됩니다

 

 

이 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안내견입니다

순하고 복스럽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중문 사이 마당에는 안채에 드나드는 사람이

 사랑채에서 눈에 띄지 말라고 헛담을 두었다고 합니다.따로 출입문도

없는 헛담이 ㄱ자형으로 사랑채를 감싸고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빤히 사랑채가 보이는데 내외법이 엄격하던 시절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매우 곤혹스러워서 사랑채를 가리는

 헛담을 쌓았다고 합니다. 예의를 존중하는 지극히 유교적인 산물로

 병풍 두르듯ㄱ자로 자리잡은 헛담이 수줍은듯 돌아앉아 있습니다.  

 

 천연염색도 체험해 볼 수있지만 이 집 야생화를 보는 맛도 달콤합니다

 

  

숙박예약은 홈페이지 게시판이나 전화로 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안방과 작은사랑은 보일러 난방이며 나머지는 장작온돌방입니다.

 

 

꽃담은 담장을 지칭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그림과 무늬로 모양을 냈다고 해서

그림담 또는 무늬담이라고도 불립니다. 꽃담은 주로 해와 달의 음기와 양기를

 불어넣어 꽃을 피우고 새를 불러들이며 풍성하게 열려있는 과실을 표현합니다.

자연을 주제 삼은 꽃담이 더 정겹게 다가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침식사는 5000원이며 점심과 저녁식사는 따로 제공하지 않습니다

 

직접 조리는 불가하고 더운물을 제공해 드립니다.

 

   

입실은 오후 2시 이후이며 퇴실은 12시입니다.

 

 

 심부자집 이야기 

전해지는 이야기는, 심부자의 재력은 9대 2만석으로, 해방 전 일제시대 때도 2만석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팔도 어디를 가나 자기 땅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구한 말 개화기 때는 화폐의 가치와 변동이 심해 나라에 세금을 종이로 납부하다가 다시 화폐로 납부하기도 하였는데 그때 은화로 납부하라는 지시에 따라 안계(지금의 의성 안계)의 자기 소유 전답을 처리하여 화폐로 바꾸자니 안계 고을에 돈이란 돈은 전부 모여질 정도 였다고 합니다.

또 이것을 청송 호박골로 옮기는데 그 행렬이 10 리나 뻗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한밤중 동네 도둑이 든다는 소문을 듣고 집안 식구들은 모두 피신하고 안사랑 마님 혼자서 집을 지키는데 한 밤중에 도적 수 십 명이 몰려들어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때 백발의 안방마님이 나아가 물건을 훔치러 왔지 기물을 왜 부수는가? 

내가 문을 열어 줄 터이니 가지고 가고 싶은 대로 가져가라 하며 직접 열쇠를 가지고 광이나 곡간을 열어 주었더니 수십명의 도둑들이 모두 한 짐씩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 후 남은 돈으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하니 그 때 돈이 얼마나 많았는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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