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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전) 김인문과 김양의 묘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09. 2. 12.

(전) 김인문과 김양의 묘를 찾아서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당나라에 주재해 있는 신라의

대사와 같은 인물이었으며 김양은 무열왕의 9세 손으로 신무왕 때의 반정공신

이었으며 태종무열왕릉과는 일제강점기때 개설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김인문의 묘와 김양의 묘가 가까이 있습니다 

 

(전) 김인문과 김양의 묘를 찾아서 

 선도산 쪽으로 위에 있는 것이 김양의 무덤이고 아랫에 있는 것이 김인문의 묘입니만 선도산

 기슭으로 내려 오면서 왕릉이 계속 이어져 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신장로를 개설하면서 묘역들을 두동강으로 갈라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옆으로는 철로가 있습니다  

 

김인문의 묘비 비각

 김인문의 무덤은 태종무열왕 묘역의 동쪽에 있으며 묘의 왼쪽에 묘비를 세웠던 귀부가

 남아 있는데 무열왕릉의 귀부와 그 형식이 비슷한 모양입니다

 

묘비의 귀부

 1932년 경 서악서원 영귀루 아래서 김인문 묘비의 잔편이 발견되었는데 판독 결과

무열왕의 아버지인 김용춘을 의미하는 祖文興大王 이 확인됨에 따라

 김인문 묘비임이 분명해 졌다고 합니다

 

귀부의 거북 발가락

  태종무열왕릉의 거북은 앞발의 발가락이 다서개이고 뒤는 4개인데 비해 김인문 묘비의

 귀부 발가락은 앞 뒤가 모두 다섯개 씩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김인문을 태대각간으로 추증

  김인문의 묘비는 효소왕이 김인문을 태대각간으로 추증하고 (695년) 서울의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그 때 건립된 것으로 추증하고 있습니다  김인문도 신라의 왕족으로

삼국통일의 공이 크기 때문에 이 곳으로 장지를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귀부의 목

받침돌 위에 있는 이 돌 거북은 네 발로 힘있게 나아가면서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는

 모습입니다 등에는 비석을 받쳐 세웠던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있습니다 

 

무열왕릉귀부와 다르게 표현한 목

귀부의 목에 새겨진 다섯개의 목 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거북의 목에 둘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열왕릉의 귀부 목에는 붉은 혈관 같은 흔적이

보였으나 이 귀부의 목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귀부의 등 조각

 거북의 등에는 큼직한 육각무늬의 등무늬가 있으며 등 주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그 바같쪽으로는 구슬을 꿰 놓은 듯한 무늬를 돌려 놓은 것이 독특합니다

 

金仁問(629~694)(진평왕 51~효소왕3)

  신라문무왕때의 장군. 자는 인수仁壽, 무열왕의 둘재아들, 문무왕의 친 동생.어려서 부터 글을 좋아하고 사어射御,음률,예서에 능하고 식견이 넓어서 남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651년(진덛왕 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할 때 당 고종으로 부터 좌령군위장군을 받고 653년에 돌아왔으며 무열왕이 즉위하자 압독주 총관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공신이 었다.  이 때 자주 백제으 침공을 받던 끝에 인문을 당으로 보내어 원군을 청하니 당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인문을 부총관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661년에 고구려를 정복하려했으나 평양이 함락되지 않았고 군량이 떨어지게 되어 인문은 많은 양곡을 보급하여 당군은 굶주림을 면하고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668년(문무왕8) 당이 다시 고구려를 칠 때 당병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고구려 유민을 거두어 들이고 백제 고토를 침범하니 당고종은 크게 노하여 인문을 신라왕으로  대치시키려하였으나 문무왕이 조공사朝貢使를 보내어 사죄하는 바람에 무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문은 당으로부터 보국대장군상주국에 임명된후 당경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당 고종은 그의 관을 호송해 보냈으며 효소왕은 태대각간을 추증追贈하고 후하게 장사지냈습니다.

당조에 숙위하기를 22년간 하였고 7차례나 당에 들어갔습니다.

 

 

김인문과 김양의 묘

 흥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사촌동생인 김균정과 조카인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에서 상대방의

장수를 불러 "개는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 ,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옳게 한 일이로다 내가 너를 탓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라" 는  말로

평정을 하고 신무왕을 왕위에 오르게합니다

 

김양의 무덤과 묘지석

 김양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9세 손으로 제 45대 신무왕의 공신으로 김양이 죽자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은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유신의 장례 예법에 따라 하라고 하였으며

태종 무열왕의 능열에 배장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초등학생의 문화재 답사

 

서악동의 선도산은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하여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무열왕의 아버지인

 문흥대왕, 등의 왕릉과 김양, 김인문의 묘가 있으며 1,000 여기로 추정되는

선도산 고분군과 장산 고분군이 있어서 김씨 왕실의 장례지로

추정하고 있는 곳 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金陽(808~857)(애장왕9~헌안왕1)

신라 신무왕대의 공신功臣으로  자는 위흔이고 태종무열왕의 세손입니다.

828년(흥덕왕3)에 고성태수固城太守로 지방관이되고 중원대윤中原大尹, 무주도독武州都督 등을 지냈다고 합니다.

흥덕왕이 죽음에 아들이 없으므로   왕의 종제 균정均貞과 헌정憲貞의 아들 김제륭(金悌隆-희강왕)이 서로 왕위 계승의 싸움을 할 때 김양은 균정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실패하여 균정은 피살되고 김양은 산야에 숨었다고 합니다.

  

837년 (희강왕2)에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궁복弓福과 결탁하여 희강왕을 치려고 할 때 김양이 같이 공모하였다고 합니다.

838년(민애왕1)에는 궁궐로 쳐들어와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임금으로 내세우니 이가 신무왕입니다.

신무왕이 불과 수개월 후에 죽자 김양은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을 내세웠습니다. 

김양이 50세로 죽자  임금은 그에게 대각간(大角干)을 추증하고 태종릉열(陵列)에 배장陪葬하였습니다.  지금 태종무열왕릉 앞에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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