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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김유신 장군 묘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08. 8. 3.

 송화산 김유신장군 묘

 

-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은 옥녀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대각간 김유신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 묘의 모양은 원형 봉토분이고 둘레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을 두르고

호석 중간에는 12지신 상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 호석 밖에는 38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만들었으며

호석과 난간 사이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습니다


- 묘의 양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있는데 서편비는 1710년에 세웠고

동편비는 1934년에 세운 것이며 가운데 있는 혼유석은 1074년에 만든 것입니다

 

 

 


12지신 상

- 띠를 나타내는 12짐승을 십이지라 하고 형상으로 나타낸 것을 십이지신상이라고 합니다

- 시간과 방향에 따라 수호신 역할을 하는데 쥐는 밤 11시부터 1시까지이며

방향은 정북을 맡고 있으며 소는 1시부터 3시까지를 맡으며 북동쪽을 맡고 있습니다 

- 이 12지신 상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얼굴은 짐승이고 몸은 사람 모습인데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 방위에 따라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순서대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12지신 상을 묘의 호석에 조각한 것은 통일신라 묘의 고유한 양식인데

중국에서는 묘 실내에 12지신 상을 만들어 넣은 것은 있어도 봉분 주위에

조각해 놓은 것은 신라만의 독특한 창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처럼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변형 발전시켜

나간 점은 통일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김유신 장군 묘가 아니라는 주장

- 12지신 상 호석이 새겨진 것은 왕릉이다는 고정관념으로 이 무덤을 김유신장군의

무덤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 묘역에 12지신 상을 조각하여 배치하기 시작한 것은 제33대 성덕왕(702∼737)능

부터 이며 김유신장군은 673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묘는 김유신장군의 묘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 하지만 후대에 와서 흥덕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능은 서산 모지사 동향한 산봉에 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 이를 보면 김유신 장군 묘의 12지신 상은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뒤에

왕릉의 예우로 묘역을 다시 조성하면서 12지신 상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가계

- 김유신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손이며 신라의 명장이었던 서현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서 18살에 화랑이 되어 무예를 닦고 35살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여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이 되게 하는데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무열왕7년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 대장이 되어 계백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전멸 시켰습니다

 

- 문무왕 8년에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신라의 영토에 야심을 품었던 당나라군사도 물리침으로써 통일의 위업을

완성 하였습니다

 

- 이러한 공로로 문무왕으로부터는 태대각간이라는 신라 최고의 관직을 받았고

훗날 흥덕왕으로부터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합니다

 

 

 

 

묘역 복원

- 1973년에 봉분 북서쪽에서 납석으로 된 돼지 상 한 개가 발견되었는데

이 납석상의 발견으로 경주박물관에서 1974년에 김유신장군 묘의 발굴조사와

석조물 복원을 위한 실측작업을 하였는데 그 때 또 동편에서 토끼상의 파편이

발견 되었습니다

 


- 묘역 서쪽에는 산신제를 지내던 제단도 묻혀 있었고 혼유석이 있던 자리도

찾아내어 복원하였으며 없어진 난간도 복원 하였습니다

 

 


비석 문

- 동쪽 비문은 공렬은 오직 이 나라에서 처음일 뿐 아니라 중국에도 비길만한 사람이

드물도다.

중국에도 관운장과 곽분양, 악무목 세분정도가 있을 뿐 이라네. 

1934년 갑술 가을에 후손 용희가 짓고 우곤이 글씨를 썼다고 하며.

- 서쪽 비문은 묘소에 아무런 석물이 없으니, 오랜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하여

흔적도 없어져서 전하지 못할 까 두렵다.  이에 작은 비석을 세워 표시해 둔다. 

 

 

이조 숙종36년(1710)겨울     부윤(시장)  의령 남지훈 지음


- 1996년 3월 4일 음력 정월 대보름 낮에 송화산 옥녀봉에서 산불이나

이곳 둘레의 도래솔과 무덤을 모두 태운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사죄 의식을 했는데

묘 동편에 꿇어 엎드려 용서를 빌었던 일이 있습니다

 

 

 

12지신 상이 조각된 능묘

경덕왕릉(내남). 원성왕릉(괘릉).    헌덕왕릉(동천). 흥덕왕릉(안강).  진덕왕릉(현곡)

김유신장군묘는 돋을세김으로 되었고   성덕왕릉(조양동)은 두리세김으로 세웠습니다 


12지신상의 복장

28대 진덕왕릉(무복)       33대 성덕왕릉(무복)       35대경덕왕릉 (무복)

38대 원성왕릉(무복)       41대 헌덕왕릉(평복)       42대 흥덕왕릉(무복)

불국사역전의 방형분(무복)          김유신 잔군묘 (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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