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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답사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5. 3. 13.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찾아서

 

 

산천이 아름다워

달도 머물다 간다는 이 곳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월류봉은

물이 차다고 해서 한천이라 했다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면서 한천정사를

짓고 강학을 했던 곳으로 초강천이 흐르는

일대의 풍광을 한천8경이라고 했으며 그 중,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은 한천8경의 제1

으로 월류봉은 절벽위에 월류 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냉천 정, 사군 봉, 산양 벽, 화헌 악,

법존 암, 청학굴, 용연 대를 한천팔경이라고

하며 우암 송시열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세웠다는 우암 선생의 유허비가

있어서 또 가 본 곳입니다

 

 

산천이 아름다워 달도 머물다 간다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의 월류봉은

물이 차다고 해서 한천이라 했다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면서 한천정사를 짓고 강학을 했던 곳으로

초강천이 흐르는 일대의 풍광을 한천8경이라고 했으며

 

그 중,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은 한천8경의 제1경으로 월류봉은

절벽위에 월류 정이라는 한천팔경이라고 하며

 

  우암 송시열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세웠다는 우암 선생의 유허비가 있어서 또 가 본 곳입니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의 월류봉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물 맑은 초강천 상류가 흘러 수려한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곳 월류봉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우암의 한천정사를 따서 한천팔경이라 하는데

월류봉(月留峰) 냉천정(冷泉亭) 사군봉(使君峰) 산양벽(山羊壁) 화헌악(花獻嶽),

법존암(法尊巖) 청학굴(靑鶴窟) 용연대(龍淵臺) 입니다.

 

이곳 월류봉 주변의 경관에 반해 우암 송시열이 32세 되던 해 들어와 자연을

벗하며 은신하던 별서터로 서재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후세에 우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이 세워졌다가

고종 초 철폐된 뒤 유림들이 1910년 한천정사를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우암 선생의 유허비는 선생이 이곳에 잠시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알리기 위해 정조 3(1779)에 세웠다고 합니다

 

한천정사가 위치한 곳은 초강과 석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월류봉과 같이

선경을 이루는 곳으로 월류봉에 오르면 산세와 마을풍경,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과, 구하도가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사군봉 아래에서 나란히 말을 탄다.

화헌에 봄 왔거늘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구나.

청학에 둥지 비어있고 물수리 새끼 날고 있네.

 

백양에 길 끊기니 두견새 원망하며 울어댄다.

지금은 유월이 오직 높은 봉우리요,

예전처럼 깨어있는 마음 냉천때문이라.

 

유적으로는 법존암 아직 남아있고

골짜기 입구에 안개비 용연동을 가리네"

 

 

使君峯下騎相聯     春入花軒客未還

 

靑鶴巢空飛乳鵬     白羊行斷怨諦鵑

 

袛今留月唯高蚰     依舊醒心是冷泉

 

遺迹法尊嵒尙在     洞門煙雨鎖龍淵 

 

 

조선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이 도승지 임호신

(任虎臣 1506-1556)에게 준 한천팔경을 노래한 시입니다.

 

 

"사군봉에서 벗 임호신과 함께 말을 달려 화헌암에 가보니 봄이 왔고,

청학굴에는 새둥지가 비어있는 채로 물수리 새끼만 날고 있으며

산양벽은 길이 끊겨 두견새만 울어댄다.

 

 

월류봉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와 냉천대에 이르니 정신이 번쩍드는구나.

법존암 유적은 아직 남아있는데, 골짜기에 안개비 내려

용연대를 가리네"라는 내용입니다 

 

 

신광한은 또한 "도대체 기암괴석은 어디서부터 여기로 온 것인가?

면면이 기암이요, 걸음마다 이끼로다. 피리소리 들으며 보니

 

 

산수가 푸르구나. 알록달록 새들은 어디에서 날아왔다 가는고" 하며

이곳 한천정사 주변이 아름다운 선비의 별천지임을 노래했습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병자호란(1636.12-1637.1)때 인조(1595-1649)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 그의 아들 소현세자(1612-1645)

봉림대군(1619-1659)이 인질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관직을 사퇴하고

황간 냉천리(현재 원촌리)에 내려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황간 원촌(냉천)리의 높은 산과 깊은 물을 사랑하여

은거하면서 일체 시사를 말하지않고 날마다 사방에서 모여

배우려는 사람들과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때로는 종일토록

눈을 감은채 책을 마주하였다고 합니다 

 

 

우암 송시열의 유허비 비문입니다

 

 

이곳에는 우암이 서거한 후 지방 유림들에 의해 1717(숙종43) 한천서원이

창건되었으며, 1726년에는 영조로부터 한천이라는 사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871(고종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0년 후학들이

소규모의 한천정사를 다시 건립함으로써, 옛자취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천정사는 정면 3,측면 2칸의 목조한식팔작 기와집으로 자연석 주초위에

4모기둥을 세우고,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들였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기둥에는 한천팔경을

글로 새겨 주련을 걸어놓았습니다.

 

 

 

1999년 충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한천정사는 은진송씨 종중의 소유로

현재 황간유림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옛 추억을 새롭게 하는 경북상회 라는 담배 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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