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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

[스크랩] 천룡사지(天龍寺址)-절이 망하면 신라가 망한다고?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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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사지(天龍寺址)-절이 말하면 신라가 망한다고?

 

 

 

천룡사지

 

 

천룡사지는 경주 남산 고위봉(494m) 서쪽 아래에 있는 해발 400여m의 천룡골 약 20만평의 너른 분지에 조성되어있는 사찰터로서 최근에 건립한 천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천룡사(天龍寺)는 남산의 많은 절터 중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3개의 사찰(보리사, 창림사, 천룡사)중의 하나로서 1991년 복원된 삼층석탑과 귀부, 수조, 맷돌, 연화대좌 등 다양한 석조유물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신라 통일 초기, 사천왕사를 짓는 것이 확실한 지 확인을 하러 온 당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에 와보고 이 절이 허물어지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천룡사가 창건 연대는 사천왕사(四天王寺)나 망덕사 (望德寺)가 지으진 7세기 말 문무왕 이전에 이미 세워졌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절터에는 석당간지주(石幢竿支柱)의 귀부와 측면에 안상이 조각되어 있는 석조, 그리고 대형 맷돌,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들 모두 통일 신라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1990년 폐탑을 복원하고자 탑 주변을 발굴하였는데 이때 출토딘 팔면감실석조불상, 금동여래입상 3구, 금동대좌, 녹유전 등이 모두 9세기경의 유물로 추정된 것을 볼 때,  위의 악붕귀 이야기는 앞서 말한 시기와는 차이가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

 

천룡사 뒤쪽(북쪽)의 고위산

 

 

삼국유사 권제 3 탑상 제4 천룡사조에 보면,"동도(東都)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라 한다. 서로 전하는 말에옛날 단월(檀越)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이 천녀(天女)이고  동생이 용녀(龍女)였다. 부부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天龍寺)라 이름지었다"
고 기록되어 있어 천룡사는 신라 왕실이 아닌 일반 귀족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다.

 

천룡사는 통일신라말에 폐허가 된 것을 고려 정종(靖宗) 6년(1040)에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崔齊顔)이 성수천장(聖壽天長 임금이 오래 삶)과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함)을 기원하면서 중건하였다 한다. 전당(殿堂)과 낭각(廊閣)ㆍ방사(房舍)ㆍ주고(廚庫) 등을 신축하고, 석불(石佛) 등 몇 구를 봉안하여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으며 납입전(納入田)으로 사원을 운영하였다.

 

사찰주지는 관에서 임명하는 것이 보통인 당시의 관례를 벗어나,  최제안(崔齊顔)은 천룡사에서는 승려들 중에서 가장 덕이 높고 존경받는 이로 하여금 그를 추천하여 분향수도(焚香修道)케 하라는 신서(信書)를 남겼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사정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잘 알수는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천룡사는 고위산에 있다'란 기록이 있어 조선 성종때까지는 존속하였으며, 전해오는 '묘법연화경'이 강희27년(숙종14년-1688년)에 천룡사에서 개간(開刊)한 것으로 되어 있어 임진왜란때에도 소실되지 않고 '묘법연화경'을 간행할 정도로 사세를 유지하며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한지로 꾸며진 가로 23.5cm, 세로 34cm의 단행권이다. 이와 같이 천룡사는 신라하대인 9세기경에 창건되어 고려조를 거쳐 조선시대 적어도 숙종14년까지는 사맥(寺脈)을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대가람터였던 이곳은 땅이 넓고 기름져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모여살면서 농사를 지어오는 바람에 절터는 농지화되어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경작지로 바뀌었다

 

 

주변에서 모아놓은 석조유물들

 

 

1990년 발굴 당시 석탑부재가 흩어져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탑의 부재가 있는 곳에서 북서쪽에 금당지가 있고, 주위에는 전답이 있었다. 금당지에는 덤벙주초와 축대석(築臺石) 일부가, 그 남쪽에는 원위치에서 옮겨진 것으로 생각되는 원형주초(圓形柱礎) 1좌가 있었다.

 

석탑부재는 4매의 지대석(地臺石) 중 1매만이 이탈되었고 나머지는 원위치에 있었다. 다른 탑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아 이 탑은 단층기단의 3층 단탑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그 외에 천룡사지에서는 귀갑문(龜甲文)이 있는 석당(石幢), 측면에 안상(眼象)이 조각된 수조(水槽), 귀부(龜趺), 멧돌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물들은 석탑과 함께 통일신라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천룡사지 건물지에 대한 발굴결과 고려시대 이후 금당이 3차에 걸쳐 중수되었고, 시대가 흐를수록 탑과 금당의 거리가 좁아지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물이 배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97년 경주 신라문화연구소의 발굴작업시에는 이미 복원된 탑 주위에서 노출된 석재들은 현재 천룡사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북쪽에 모여 있었고 탑 북서편 약 15m 지점에서는 발굴 전 이미 지대석과 면석을 갖춘 기단석열이 일부 노출되어 있었다. 이후 발굴조사구역의 주변지역에는 건물지에 사용된 많은 석재들이 표토에 노출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신라, 고려 유적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기와조각도 상당수 발견됐다.
그 외에 천룡사지에서는 소형의 금제유희보살좌상(金製遊戱菩薩坐像), 금동소여래좌상(金銅小如來坐像), 청동소대좌편(靑銅小臺座片) 등이 발견되었는데 통일신라 시대 유물로 파악되며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삼층석탑-보물 제 1188호

 

 

 

 

고위봉과 천룡사 삼층석탑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옥신을 형성한 신라정형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원래 천룡사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90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조사단이 탑 주면을 발굴 조사하여 단층기단의 3층탑임을 확인하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용성스님의 손상좌인 도문(道文)스님의 발원으로 1991년 기단의 일부와 상륜부의 머리장식 대부분이 없어진 것을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

전반적으로 적정한 비례와 균형잡힌 당당한 모습의 통일신라 후기의 탑으로 옥개받침 층급은 5단이고 기단탱주는 1주이다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삼층석탑(三層石塔) 주변 배수로 정비를 위하여 부지내 유적을 발굴조사 하다가 1층 탑신석의 결실된 부분을 현대 축대석 사이에서 발견하여 석탑의 원형복원을 시행하였다.

 

 

 

 

 

삼층석탑의 기단

 

 

단층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1개만 표현되어 있고, 옥개받침은 5단이다.  또 1층 옥신만 탑신괴임을 갖추고 있으며 2,3층 옥신은 1층에 비해 급격히 작아진 형태이다. 

기단의 구성이 두개의 바깥기둥과 하나의 안 기둥 양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나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층석탑의 탑신

 

 

삼층석탑의 상륜부

 

기단 갑석은 2단이나 무게가 덜해 보이며 좁은 듯 한 인상을 주고 몸돌은 1층의 것에 비해 2. 3층의 것들이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데 이는 산 중에 있는 탑에서 흔히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여기 남산에서도 용장사지 3층 석탑이나 늠비봉의 탑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인다.

각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각각 5단이고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 단부에서 살짝 번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2, 3층의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무거운 듯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균형감이 오롯이 살아난다.

1층 탑신의 윗면 가운데에 원통형의 사리공이 있으며 탑신은 상당부분 파손이 되어 있다. 2006년 석탑주변 배수로 공사사 1층탑신 북서편 우주 상부인 탑신편을 발견하여 접합 복원 하였다.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모두 오래전에 결실되었던 것을 새로 복원을 하였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6.97m이다.

 

현재 복원된 3층 석탑 부근에서 북쪽으로 약 12.4m 떨어진 지점에는 금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이 터 안에는 곱게 다듬은 장대석 5∼6개가 연결되어 있다.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어 금당의 규모와 칸 수는 확인 할 수 없다. 이 금당지와 탑지로 보아 이 곳의 가람 배치를 남북 일직성상의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통일 신라의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의 구조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처음 개창 때 목탑이 조성되었다가 유실되고, 그 자리에 9세기경 석탑을 봉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금당지의 뒤쪽을 강당(講堂)으로 짐작하고 있다.

 

귀부(龜趺)

 

 

 

 

 

 

 

 

천룡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바로 이 귀부이다. 귀부는 천룡사 삼층석탑 남쪽  폐가가 된 민가의 마당에  있다.

일반적으로 귀부는 비석의 대좌로 쓰인 경우가 많으나 이 귀부는 비석의 대좌가 아니라 당간지주의 대석으로 쓰인 귀부이다.

일반적으로 당간은 2개의 지주가 양쪽으로 받쳐 그 사이에 당간을 세우고 가로 고정대를 길러 끼워 고정하는 것이 대부분이나 천룡사의 당간은 귀부의 등에 홈을 파서 그 홈에 당간을 세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형식이며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귀부의 크기는 145×135높이75이다

 

 

 

 

 

이 당간지주의 귀부는 안타깝게도 머리 부분이 잘렸고, 경문(經文)을 새겨 몸체 위에 세웠던 당석(幢石-당간)도 유실되어 몸체만이 남아 있지만 주변의 화려한 문양은 돋보인다.

 

4각 대석 위에 귀부를 조각해 놓은 귀부는 머리 부분과 발 부분은 훼손되었으며, 몸체부분과 귀부의 꼬리 만 남아 있다. 꼬리는 옆으로 꺾어 몸체에 붙였으며 네 발로 땅을 지탱하는 모습이고 등에는 육각형의 귀갑무늬가 얇게 선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부의 등에는 당간을 세웠던 간공(둥근 구멍)이 있다

 

 

등 가운데 당간을 세웠던 자리 주위에는 꽃심 모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고 네 장의 꽃잎 형태의 조각이 거북 등을 덮고 있다

당간석을 세웠던 간공의 지름은 15깊이는 5이며 귀부원형지름은 70아래 부분은 4조각의 연화문과 보상화 두 송이씩 장식되어있다.

 

 

석조(石槽) 

  

 

 

 

 

 

 

 

남쪽으로 건너다보이는 산허리에 석조가 1기 있는데, 흥륜사지(興輪寺址)에서 발굴된 석조와 버금가는 큰 것으로 가로 3.8m, 세로 1.5m에 이른다.

 

 

 맷돌

 

 

 

 

 

 

 

 

천룡사 경내에는 암맷돌 2기가 있다. 1기는 삼층석탑 열 석부재들을 모아놓은 곳에 있으며 다른 1기는 삼층석탑의 동쪽 산기슭 석조에서  아래 마을 쪽으로 내려오면 있다.

 

맷돌의 윗돌은 없고 아랫돌(암맷돌)만 남아있는데 곡물이 고이는 부분은 일부 결실되었다. 곡물을 가는 부분은 지름이 90cm이며 내부에는 방사형의 홈이 새겨져 있고 갈린 곡물이 모이는 부분에는 너비는 12-17cm 의 U자 형태로 파여 있으며 전체의 크기는 김쪽이 137cm, 짧은 쪽이 129cm이다.

또 다른 맷돌의 크기는  너비59높이 13㎝이다.

 

 

승탑(僧塔)

 

 

천룡사 주변에는 2기의 부도가 있다. 둘 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종형의 승탑인 것을 보아  조선시대 어느 스님의 승탑으로 추정된다

1기는 천룡사 주변 식당 근처에 있으며 높이 130cm, 지름 76cm로 월화당 지원대사(月華堂知圓大師)라고 음각이 되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쉽지 않으며 대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다른 1기는 천룡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6-700m 떨어진 곳, 저수지 둑에 있는 것으로 높이 120cm, 지름 약 80cm이다

 

 

 

가운데 경?당?유대사(慶?堂?維大師)라고 음각되어 있으마 마모가 심하고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있으며 잡초가 우거져 찾기가 힘들다.

이 승탑들은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이동된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는 많은 수의 승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유구(石造遺構)

 

3층 석탑 서쪽에는 절 터 여기저기 흩어진 석등과 초석, 맷돌 등이 모여 있다. 이곳에 있는 석조물은 천룡사지 전체에 흩어져 있던 것을 것들로 삼층석탑을 복원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다

석조유구의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유구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비하여 놓았다. 석조유구 중 22기는 치석의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석등과 맷돌, 간주석, 탑의 일부분으로 추정된다.

 

 

 

 

 

특히 석등 하대석은 그 모양새가 두툼하고 연화 문양을 가지고 있는데, 4각의 지대석 위에 연화 잎이 엎드려 있는 형상인 복련(覆蓮)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위에는 곧은 받침 기둥 돌인 간석(竿石)을 세웠던 지름 27㎝의 간공(竿孔)이 보인다. 이 외에 여러 시기에 조성된 다양한 연판 장식의 석등 흔적도 살필 수 있다.

 

 

 

 

 

 

천룡사지에서 발견된 숫기와의 문양

 

 

절 뒤편에는 용두암(龍頭岩)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가 천룡사의 석조와 연결되어 수원(水源)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용두암을 지나면 천룡사에 있다가 구도행각(求道行脚)의 길을 떠난 여인의 이야기가 얽힌 열반곡(涅槃谷)이 있다.

 

절터 북쪽에 최근에 지으진 법당과 요사채가 있다

 

 

최제안의 신서 내용


“단월(檀越) 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同內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주국(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쓴다.

경주 고위산의 천룡사는 허물어져 폐허가 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래서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과 나라와 백성의 편안과 태평을 발원하여, 불전과 불당, 회랑과 전각, 방과 부엌, 창고 등의 공사를 일으켜 다 마치었으며, 돌과 흙으로 불상 몇 구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열었다. 이미 나라를 위하여 다시 절을 지었으니, 관청에서 주지승을 정하여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지가 바뀔 때마다 도량의 승려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시주받은 토지로 절의 경비를 충당하는 것을 보니,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시주받은 토지가 2백 결이었고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四面)의 산사도 각각 20결씩이었다. 모두들 직책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름지기 계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절에서 여러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여러 차례 주지로 삼아서 분향하고 수도하는 것을 불변의 규칙으로 삼았다.

제자 제안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였다. 우리 천룡사에서도 절의 스님들 중에서 재주와 덕이 뛰어난 고승으로 우리 절의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주지로 삼아서 길이 분향하고 수도하게 하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문자로 자세히 기록하여 절의 행사 담당자에게 주었다. 이번 주지부터 시작할 것이니, 유수관(留守官)이 이 문서를 받아 도량의 여러 스님들에게 보일 것이다. 승려들도 각자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 관직을 앞에 쓴 것처럼 갖추어 서명한다.”

살펴보건대, 중희는 거란 흥종(興宗)의 연호이니, 고려 정종(靖宗) 6년 경진(서기 1040)이다.

 

東都南山之南 有一峰屹起 俗云高位山 山之陽有寺 俚云高寺 或云天龍寺 討論三韓集云 雞林土內 有客水二條 逆水一條 其逆水客水二源 不鎭天災 則致天龍覆沒之災
俗傳云 逆水者 州之南 馬等烏村南流川是 又是水之源 致天龍寺 中國來使 樂鵬龜來見云 破此寺 則國亡無日矣
又相傳云 昔有檀越有二女 曰天女龍女 二親爲二女創寺因名之
境地異常助道之場 羅季殘破久矣 衆生寺大聖所乳崔殷諴之子承魯 魯生肅 肅生侍中齊顔 顔乃重修起廢 仍置釋迦萬日道場 受朝旨 兼有信書願文 留于寺 旣卒 爲護伽藍神 頗著靈異
其信書略曰 檀越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崔齊顔狀 東京高位山天龍寺殘破有年 弟子特爲聖壽天長民國安泰之願 殿堂廊閣 房舍廚庫 已來興構畢 具石造泥塑佛聖數軀 開置釋迦萬日道場 旣爲國修營 官家差定主人亦可 然當遞換交代之時 道場僧衆不得安心
側觀入田 稠足寺院 如公山地藏寺 入田二百結 毗瑟山道仙寺入田二十結 西京之四面山寺 各田二十結例 皆勿論有職無識 須擇戒備才高者 社中衆望 連次住持焚修 以爲恒規
弟子聞風而悅 我此天龍寺 亦於社衆之中 擇選才德雙高大德 兼爲棟梁 差主人鎭長焚修 具錄文字 付在綱司 自當時主人爲始 受留守官文通 示道場諸衆 各宜知悉 重熙九年六月日 具銜如前署
按重熙乃契丹興宗年號 本朝靖宗六年庚辰歲也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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