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의 문화유산을 찾아서
경주박물관대학
29기 2학기 수강하면서.
2008. 10. 19 (일) 10시부터
17시까지 경주는 5악 이라 하여
토함산을 동악 선도산을 서악 금오산과
고위산을 남악 소금강산을 북악 낭산을
중악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5악 중 중악인
낭산을 중심으로 문화유산 답사를 다녀
왔습니다 오늘따라 국제마라톤대회가
있어 시내 전역이 교통을 통제하는
바람에 계속 도보로 답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망덕사지
황금빛 물결치는 벼이삯들의 출렁거림이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쌀 직불금이라는 돌발사고가......??????
사천왕사가 부처님의 힘을 빌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망덕사는 당나라 황제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절이라고 합니다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 확인 차 신라에 온 악붕귀가
사천왕사 대신 망덕사를 보여주자
망덕요산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망덕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망덕사 13층 목탑의 쌍탑자리
효소왕이 낙성회에서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공양을 한 뒤 진신석가로 부터
조롱을 당한 설화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경주망덕사 당간지주
당간지주 맨 윗쪽의 가운데 부분만 약간 파여 있는 것으로
보아 하단에도 홈이 있어서 상하좌우의 균형을
잡아주는 곳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효소왕이 낙성회 자리에서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공양을 한 뒤 스님에게 이 참에 돌아가서
누구에게도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를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스님이 웃으면서
폐하도 남더러 석가의 산 형체에게 공양했더라고
말하지 마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남산 비파임
쪽으로 사라졌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장사 사벌지 비석
눌지왕때의 충신 박제상이 왜국에 불모로 가 있던
미사흔을 구하고자 떠난 뒤에 그 부인이
박제상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이 곳 모래사장에서 두 발을 버둥거리며
통곡을 하며 슬피 울었다는 벌지지에
석굴암 연구회에서 이 비석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신라 신문왕릉
제 31대 신문왕릉으로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모양의
보호석 44개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왕릉에 12지신상을 두르기 직전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정 남에 해당하는 받침돌에는 문(門)자가 새겨져 있어서
이곳이 현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해 둔 곳으로
횡혈식 석실분이어서 한 봉분 내에 추가로 장례를
지낼 수 있도록 왕릉을 조영해 둔 것 같습니다
현재 신문왕릉으로 지정된 이 능은 문헌에 전하는
기록과 그 위치가 다르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이 돌아가시자 낭산의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고
효소왕은 망덕사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현재의 신문왕릉은 효소왕릉으로 추정되므로
이 곳에서 남쪽으로 4km 밖에 있는 현 효소왕릉은
수정되어야 맞다고 합니다
사천왕사지
사천왕사 금당지 남쪽 도로변에 있는 석조 귀부
목이 없어서 보는이 마다 너무 가련해 보일 것만
같아서 뒷모습으로 돌려 보았는데......?
동측 귀부에는 사천왕사사적비가 있었고 서측
귀부에는 문무왕릉 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무왕을 화장한 뒤에 사천왕사에
그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통일신라에서 최초의 쌍탑가람은 사천왕사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후에 망덕사와 감은사로 이어지는데
이 사찰들은 모두 호국을 위해 창건한
사찰들이라고 합니다
사천왕사지를 발굴 조사하는 안내판
통일신라 이전의 사찰들은 모두 불상을 모신 금당 앞에
1기의 목탑을 세우는 일탑일금당식의 사찰조영
방식을 따르다가 통일 이후에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 양면에 쌍탑을 세우는 쌍탑 가람
배치로 변하는데
사천왕사는 통일 이후에 발전하는 쌍탑가람 제도에
의한 최초의 사찰이라고 합니다
벼 수확을 하고 있는 정면을 지나 전신주가 있는 곳으로
푸른 천막으로 가려져 있어요
사천왕사에 머물렀던 고승은 명랑, 양지 스님이 있으며
특히 도솔가. 산화가. 제망매가.등의 향가를 지었고
피리를 잘 불어서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추었다는
月明師가 있었는데 사천왕사의 앞 마을을
월명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사천왕사지에 있는 당간지주는 고정하는 구멍이
상 중 하 세 곳이 있는데 중간에 있는 것은
둥글고 상 하에는 모두 네모난 구멍으로
망덕사 당간지주와도 다릅니다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첫번째 여왕이신 27대 선덕여왕, 28대 진덕여왕,
51대 진성여왕. 이렇게 세분의
여왕이 계셨답니다
당시 신라에는 백제와 고구려 등 주변국의 빈번한
침략과 신라의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당태종이 선덕여왕의 즉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덕여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선정을 배풀어 보기 위해서 ... ...
선덕여왕은 지기삼사를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머리가 좋다 것을 알리고 황룡사 9층목탑,
분황사건립, 첨성대 축조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선정을 배풀었습니다
지기삼사(知幾三事)는
모란꽃 그림을 보고 벌과 나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
영묘사에서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여근곡 백제군사를 물리친 이야기하며
선덕여왕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한 이야기는
내 비록 여자이지만 머리가 좋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경주 능지 탑지
능지탑, 능시탑, 연화탑이라고도 하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으면서 그 원형을 알 수가 없어서
2단만 쌓고 나머지 돌들은 옆에
모아 두었다고 합니다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 올린 5층 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십이지신상은 크기와 양식이 조금씩 달라서
아마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모아서
능지탑에 혼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생사지를 찾아서
낭산의 서쪽 자락에 있는 최치원 선생의 독서당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100m지점에 목탑지가
남아 있고 그 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100여m 지점에 있는 사찰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던 그 탑이 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합니다 단 불상대좌는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합니다
중생사지에서 나온 불석조 자료들은 모두
한 곳에 모아두고 있다고 합니다
중생사지 마애삼존불
본존불은 두건을 쓴 피모지장보살로 확인되고
협신은 각기 신장상 이라고 합니다
왼쪽 신장상이 오른 손에
긴 칼을 들고 있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보살상과
신장상이 나란히 배치되고 있는데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고 왼쪽 신장상은
오른 손에 검을 들었고 오른쪽 신장상은
두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
악귀를 몰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중생사지는 낭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전해지는
능지탑과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낭산 자락에도 잘 익은 감이 가을을
제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주구황리삼층석탑
이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과
여래입상. 금동사리함이 나왔다고 합니다
좌상의 높이는 12.2cm로 국보 제79호이며
여래입상은 12.2cm로 국보 제 8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고 합니다
구황리삼층석탑을 반대편에서 낭산을 향하여
잡아보았는데황복사의 삼층석탑은 신문왕을
위해서 건립된 탑일라고 합니다
전 황복사지
전 황복사지는 경주 낭산의 동북쪽 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논 가운데에 있는 석재들은 무덤의 호석으로
황복사 동쪽 밭으로 옮겨져 있는 12지신상 사이에
끼운 탱주석으로 생각됩니다
이 석재들은 무덤의 가장자리처럼 큰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바깥쪽이 곡선으로 다듬어져 있어서 이를 복원해 보면
김유신장군 묘 보다 약간 큰 둘레 51m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신문왕릉으로 보기에는 문제점들이 많지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부합되고 황복사 탑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들어 졌다는
점으로 보아 신문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황복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로는
1937년 평와편 뒷면에 황복사라고 음각된
명문기와가 발견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가 낙발한 후
출가한 곳이라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고 합니다
벼 수확이 한창인 황복사지에는
머리와 몸체가 파손된 귀부들이 처박혀서
괴로운 듯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황복사지에는 삼층석탑, 십이지신상, 귀부,
당간지주 등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트랙터로 잘 익은 벼를 한창 수확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평화롭게만 느껴지지
않는것은 무었때문일까?
미탄사지 삼층석탑
황룡사지 남편 논 가운데 위치한 석탑으로
이 부근에는 신라때 미탄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은 완전히 붕괴된 것을 1980년 6월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모아서 다시
복원한 3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 하루종일 걷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심신이 피곤합니다
집에 오니 가을 햇볕에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고 야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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