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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문화재답사

봉화 축서사를 찾아서

by 송강 (松岡) 최 재 모 2010. 7. 20.

 봉화 축서사를 찾아서

 

축서사란 이름은 축서사의 축자는 독수리  

축(鷲)자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던 영축산을   

 본따서 축으로 읽는데 취라고도 하며 서자는 깃들서(棲)로  

  독수리가 사는 절이란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험준한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이도  

   있다고 합니다 축서사는 신라 제30대 문무왕13년(서기 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스님이 어느 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 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채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  

  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고 합니다훗날 이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는 축서사의 창건설화라고 합니다 이때 산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해서 문수산이라 한 듯 합니다3년 뒤에    

    의상 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입니다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축서사는 원래 퇴락했던 절인데 현재는 대찰이 되어

신도들도 많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문수산 축서사의 일주문입으로 축서사라는 이름은

독수리가 사는 절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이

있는 절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서울의 이름 있는 스님이 이곳에 내려오면서

절이 많이 커졌다고 합니다.  

 

 

 현재 축서사의 선원장인 무여 스님은 194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셨으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

 

 

남의 집 머슴살이 같은 속세의 생활을 떨치고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고 합니다  

 

 

이후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관음사, 칠불사,

망월사 등 전국 선원에서 40여 년 동안

수선안거를 하셨다고 합니다  

 

 

 현재 축서사의 선원장인 무여 스님은 1987년 이후

봉화 축서사에서 주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축서사(鷲棲寺)는 한자음으로는 취서사로 읽지만 

‘鷲’자를 불교식으로 읽으면 ‘축’이 되어

축서사로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13년(673)에 의상대사가

 영주 부석사보다 3년 앞서 창건한

사찰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사찰 중에는 의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절이 많습니다만

이 축서사는 의상이 직접 창건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의상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대사의 이름을 빌려야만 불사가 잘 될 것이고,

절의 권위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의상이 이 축석사의 불사에 관계를 했다면 재가만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라고 합니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건물에는 빛 광(光)자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 절의 비로자나불은 보광전 안에 있습니다. 

  

 

 불상의 수인과 불상이 있는 건물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 절은 원칙이 잘 지켜져서 ...

 

 

빛 광자가 들어간 건물에 비로자나불이 있고 수인도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권인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이고 왼 손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검지 끝에

닿도록 하는 손의 형태로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미혹함과 깨달음이

원래는 하나라는 뜻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 절의 비로자나불과 광배는 보물 9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축서사는 전통사찰로 전통사찰임을 보여 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흰 옷을 입고 있는 비로자나불상이라고 합니다.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되는

비로자나불은 대웅전을 바라 보고 우측의

보광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상호와 몸 전체가 백색입니다

 백색인 경우 약사여래나 미륵불은 많지만 이곳

비로자나불은 특이 하게 흰색입니다

 

 

 이 곳 비로자나불도 원래는 금색 이었는데 한국전쟁

이전에 백색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비로자나불은 문수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축서사에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1.08m입니다,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대좌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습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으로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절의 창건 유래는 의상대사가 인근 지림사에서 묵던 중 창문으로

 야광이 비쳐 나가보니 현재의 절 자리에 서광이 비치니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축서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비로자나불과 관계가 깊은

절이며 비로자나불은 화엄경의 주불로 알려져 있습니다. 

 

 

  빛에 비유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불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 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 광전, 약사전, 선승당, 동별당, 서별당, 청련당,

백화당, 범종각 등 건물이 있었고, 암자도 상대,

도솔암, 천수암 등이 있었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 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 1905년)과 정미 7조약으로

 왜구의 속국화 되는 것을 분개하여 의병이 항일 투쟁을 할 때 

 

 

일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고 합니다. 이 때 천년 고찰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축서사는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고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유물들이  재가 되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석등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석등으로 지대석은 방형으로

각 면에 2구씩 안상이 새겨져 있으며

팔엽의 복연을 만들었는데

 

 

각 모서리에 귀꽃을 세우고 상면에는 4단의 곡형과 각형의 

괴임을 만들어서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독수리 큰 지혜의 비로자나불의 이름으로 

이 곳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평화와 건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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