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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를 찾아서

설총의 묘를 찾아서

by 고우니 ; 송강(松岡) 최재모 2011. 1. 5.

 

          (전) 홍유후 설총의 묘를 찾아서

 

 

설총은 신라10현의

한사람으로 최치원과 함께

신라3문장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자는 총지로.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

이며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요석

공주입니다 태종무열왕 때인 654~66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천성이 명민

했으며  경사와 문학에 널리 통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열전 제6에는 설총이 신문왕의 요청으로

우화를 지어 들려준 기사가 나오는데 이 우화는

국왕에게 아첨하는 여인의 애교보다 정직한 신하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것을 권하는 내용으로 통일

신라의 전제 정치하에서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을 주장한 것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설총의 묘라고 전해져 오는 설총의 묘는

 경주에서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진평왕릉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설총은 6두품 출신으로서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총애와 신임을 얻음으로써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진출을 이루었습니다

 

 

신라는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의 장인 경이 설치됨으로써

 국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식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설총은 이러한 국학의 설립과

 교육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위치는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 방향으로 보문마을 4길

 매점이 있는 마을회관 바로 뒷편에 있습니다  

 

 

 

요즈음은 펜션이랑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서서 새마을이

 조성되면서 조금은 돌아다녔습니다만 뒷편에

보이는 봉분이 설총의 묘입니다

 

 

설총은 구경을 우리말로 읽어 학생들에게 강론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을 만들어 당시 중국 학문의 섭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후세에 이르러 특히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설총이 우리말로 경서를 읽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여

이를 이두의 창제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두로 쓴 기록이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설총은 이때 이두를 창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리·집대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설총이 글을 잘 지었다고는 하나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글자가 결락된 비명 몇 점 외에는 전하지 않으며

 

 

 

  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를 719년

성덕왕 18년에 지었습니다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侯)에

 추봉되어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원효가 요섭공주를 봐서 설총을 잉태시켰을때 

세상 사람들은 파계승이라 손가락질을 하고

원효는 누더기에 깡통을 차고 두들기며

돌아 다니면서 

 

 

얼레 껄레 원효란 넘은 요레 저레 나쁜놈이라고

외장을치고 다녔다는 소설의 한토막에서~~~ 

가장 인간적이라 이미 원효에게는 계율이

필요 없는 혜탈스님이었다고 합니다

 

 

원효대사와 설총과 삼국유사를 쓰신 일연 스님은

 경산 출신으로 경산의 삼 성현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원효스님은 일반 스님들과는 달리 스스로 파계승이라 하면서

생활불교에 뛰어들어 제일 낮은 인간들을  교화 시키시며

살아가신 분으로 유명하신 대승입니다

 

 

원효대사가 서민 불교에 뛰어들었다면 의상대사는

 귀족불교에 뛰어 드신 분이고 두분 대사님이

 신라의 성승 중에는 양대 산맥을 이루신

해탈스님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오셨다가 그냥 가시는 분들이 많은데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는 제가 본 당간지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간지주이고 논 가운데 홀로선

당간지주와 석조도 볼만한 유산들입니다

 

 

 

연화문 당간지주의 커다란 연화문입니다만 중앙에 난 상처는

 몰상식한 엽사들이 탄착군 조준연습을

 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비록 높이는 낮아도 연화문이 아주 예쁘고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논 가운데 외롭게 앉아있는 사각수조의 모습입니다만

 사각수조 바닥에는 물빠지는 구멍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또 다른 당간지주가 한쪽 몸체가 잘려나간 체

 외롭게 서 있습니다

 

 

진평왕릉 일대가 셕양무렵이면 선도산에 걸려있는 석양의

 노을을 받아 서라벌을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풍광

때문에 요즈음 펜션이랑 전원주택들을

짖느라고 야단법석들입니다 

 

 

 

 

화왕계와 설총 이야기

 

신문대왕이 한여름에 높고 밝은 방에 있으면서 설총을 돌아보아 말하기를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더운 바람이 조금 시원하니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고상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우스개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리라.

 

그대는 반드시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니 어찌 나를 위하여 들려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설총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에 화왕이 처음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이를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날이 되어 요염하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요염한 넋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뵈었는데 오직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미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또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서울 성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의 빛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할미꽃’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건대‘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에 가득 감추어두어도 반드시 좋은 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으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생사와 삼베가 있다 해도 왕골과 띠풀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두 명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니

 

화왕이 “장부의 말도 또한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장부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그래서 왔을 뿐인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이 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당은 낭서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그것을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왕이 서운한 듯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기록해두어 왕의 경계로 삼게 하라.” 하고 설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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