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태화리 감모사지 오층석탑을 찾아서
김천 태화리 오층석탑을 찾아서
김천 봉산면
태화리 마을회관
부근 복숭아밭에 있는
탑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석탑이지만 마을이름이 가막리
봉명으로 가매기라고 하며 옛날
가막사라는 절이 있어서 마을이름을
가막리라고 하며 봉명리는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박완 이라는 분의 증조부께서
이 곳 경치가 아름다워 새들이 날아와서
노래한다는 의미에서 봉명이란 두 글자를
돌에 새겨 놓은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감모사지 또는 가막사지 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과수원 속에 5층탑만이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이 석탑은 축조
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며 감모사지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석의
부재들을 모아서 만든 탑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봉명 마을은 고려말 가막사를 설립으로 시작하여 이조 중엽
충주박씨, 영천 최씨, 해풍김씨 경주 이씨가 정착하면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합니다
낙동강 상류천인 직지천이 봉명마을을 감싸듯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기름진 옥토의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는 마을입니다
옛부터 경부선 기차길과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로
고속전철까지 마을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50여 세대가 봉양의 꿈을 키워가면서 음양의
조화로운 마을을 가꾸어 가고 있는
평화로운 농촌마을입니다
감모사지라고도 하는 가막사지 오층석탑은 김천 봉산면
태화리 마을회관 부근의 복숭아밭에 있는 탑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층석탑 이지만 마을 이름이
가막리 봉명으로 가매기 라고 합니다
옛날 이 곳에 감모사(가막사)라는 절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가막리(가매기)라고 합니다
봉명리는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박완 이라는 분의
증조부께서 이곳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새들이 날아와서 노래한다는 의미에서 봉명이란 두 글자를
돌에 새겨 놓은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감모사지 또는 가막사라고도 하는 절은 간 곳이 없고 지금은
과수원 속에 5층 탑만이 외롭게 남아 있습니다
이 오층석탑은 축조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며 감모사지
주변에 흩어져있던 탑석의 부재들을 모아서 만든
탑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석탑으로 중대석이 없고
1층과 3층의 탑신도 없고 상륜부도 없습니다
이 탑은 1층 기단의 면석에 안상이 있고 탑신부의
각 면에는 우주를 모각 하였습니다
이 탑은 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으나 파손이 심하고
4층과 5층의 옥개석과 탑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감모사지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의 석재들을 조합하여
올려진 탑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려말에 아마 가막사라는 절이 이 곳에 들어서면서 부터
이마을이 태동을 하게 된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조 중엽에는 용호동 이라고 하였으며 그 뒤에 가막리
또는 가매기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행정구역이 한 때는 충청북도 황간군 황남면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1914년 조선총독부 령에 의해
경북 김천군 봉산면 태화동 금릉군 봉산면 태화 1동에서
김천시 봉산면 태화 1리 봉명으로
동명이 바뀌게 된 유래들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는
음과 양이 조화로운 평화의 마을입니다
태화 1리 경로당에서 음과 양의 하나됨을 만방에 알리며
마을을 사랑하는 애향시 한편을 보았습니다
양 음 조 화 화 평 동 (陽 陰 調 和 和 平 洞)
손 손 대 대 건 영 화 (孫 孫 代 代 健 榮 華)
여 봉 봉 속 출 입 걸 (如 鳳 鳳 續 出 入 傑)
양지와 음지가 조화를 이루어 서로 화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자손손 대를 이어 건안과 영화를
누리면서 새들이 즐겨 노래 하는 봉명리에는 들어가고
나가는 자손들이 영웅호걸로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애향시 인 것 같습니다